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콘텐츠 영역

‘말 다듬기’에서 유의할 것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2014.09.12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인쇄 목록

법제처가 우리 법조문에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일본식 외래어를 대대적으로 정리한다고 한다. 6월부터 두 달 동안 법령 전수조사를 통해 법률 36건, 대통령령 105건, 총리령 및 부령 169건 등 총 310건의 법령에서 37개의 정비대상 일본식 용어를 골라냈다는 것이다.

이 보도를 보면서 ‘바꿔야 할 말이 겨우 37개밖에 안 되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생각부터 했다. 그러다가 법제처가 2006년부터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해왔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번엔 ‘아직도 그렇게나 많나’ 하고 의아해진다. 이번이 마지막 정비작업이라니 추이를 지켜보기로 한다.

정비대상 용어 중 대표적인 것은 일본 법률 용어를 그대로 가져온 납골당(納骨堂)이다. 이 말은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 등 4건에 쓰이고 있는데, 뼈를 들여 놓는다는 의미보다는 ‘돌아가신 분을 모신다’는 뜻에서 ‘봉안당’으로 바꿔 쓰자는 게 법제처의 방침이다. 또 농지법 시행규칙 등에 올라 있는 ‘엑기스’는 ‘추출물’로 대체된다. 네덜란드어 ‘엑스트럭트’(extract)의 발음을 따온 엑기스는 참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다.

나는 1974년 신문사에 들어가 6개월간 견습을 했는데, 당시는 ‘학업이나 실무 등을 익힌다’는 의미의 ‘견습’(見習)이 일본어 ‘미나라이’(みならい)이며 그걸 그대로 우리 발음으로 읽은 것인 줄 몰랐다. 신문의 일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선배들 어깨 너머로 보고 익히는 식이었으니 오히려 정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견습은 ‘수습’으로 바꾼다는데 견습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법제처는 이번에 정비되는 용어들에 대해 해당 부처와 협의한 뒤 내년 중 입법이 완료되거나 관련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될 수 있게 각 부처를 독려할 계획이라고 한다. 얼마나 호응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법률용어나 행정용어를 가다듬고 고쳐야 할 곳은 법을 다루는 실무 기관인 법제처보다 실제로 늘 그 일을 하는 해당 부처들이다. 우정사업본부처럼 용어 순화작업을 꾸준히 해 일정한 성과를 낸 곳도 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반드시 국립국어원 등 어문 관계기관과 긴밀한 협조와 협의를 거쳐 추진해야 한다. 납골을 봉안으로 고치는 것은 우리가 원래 쓰던 말로 돌아가는 일이다.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그릇이나 봉안당에 모시는 게 바로 봉안이다. 그러니 말을 고치고 바로잡는 작업은 전거를 확실하게 따지고 철저한 고증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정비작업에서는 ‘개호비(介護費·간병비)’처럼 용어를 변경할 경우 기존 법리에 정한 의미에 영향을 끼치는 용어나 ‘수속(手續)’ ‘수하물(手荷物)’ ‘신병(身柄)’, ‘방사(放飼)’처럼 적절한 대체용어를 찾기 어려운 용어는 제외됐다고 한다. 그러니 더욱 더 널리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말 다듬기’를 통해 2012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개씩 확정된 순화어를 발표해 왔다. ‘생생예능’(←리얼 버라이어티), ‘따름벗:딸림벗’(←팔로잉:팔로어), ‘공인자격’(←스펙), ‘본따르기’(←벤치마킹) 등이 2012년 1월부터 12월까지 우리말다듬기위원회가 선정한 순화어라고 한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는 매월 3~5개의 순화어를 결정해 발표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이 금년 9월 1~12일에 ‘다듬을 말’로 내놓은 것은 플리마켓(flea market) 텀블러(tumbler) 홈메이드(homemade) 에코 백(eco-bag) 가드닝(gardening) 등 다섯 가지이다. 이렇게 제시된 말에 대해 의견을 공모한 뒤 누리꾼이 제안한 순화어 후보와 우리말다듬기위원들이 제안한 순화어 후보를 함께 검토해 그중에서 순화어를 확정하고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캐노피는 덮지붕으로, 쓰키다시(つきだし)는 곁들이찬으로, 싱크홀은 함몰구멍, 땅꺼짐 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바꾼 말이 실제로 잘 쓰이고 있느냐는 둘째 치고 국민과 함께 말을 다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말 다듬기를 영어에 편중해 추진하지 말고 일본어 중국어 등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기망(欺罔)한다거나 지득(知得)한다거나 잠금장치를 뜻하는 시건(施鍵)장치 따위의 어려운 말을 써야만 일을 제대로 하고 행정의 권위와 존엄을 살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많다.

그런데 품신(稟申)한다는 말도 정비 대상으로 들어가나 본데, 그런 것은 좀 경우가 다르지 않을까. 품신은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여쭈는 일을 말하는 단어인데, 우리가 예전부터 써오던 언어요 꼭 필요한 말이다. 임금에게 바치는 상주문(上奏文)을 맡아 보는 관리, 즉 품리(稟吏)도 있었고 왕세자가 섭정을 할 때 내리는 품령(稟令)이라는 명령도 있었다.

이런 말을 뭐로 바꿀 수 있겠는가? 오늘날 잘 쓰이지 않아 낯설거나 의미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고전이 된 말까지 바꾸려 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 파괴행위와 다름없다. 그런 단어들은 참 많다. 유의해야 할 일이다.

임철순

◆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논설고문으로 ‘임철순칼럼’ 집필.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