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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날’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정영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017.10.24 정영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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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정영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매년 10월이 되면 독도 관련 행사가 풍성해진다. 10월 25일 ‘독도의 날’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2000년에 독도수호대라는 한 시민단체에 의해 정해졌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역사적 의의를 기린다는 취지하에 그 제정일인 10월 25일(1900년)을 ‘독도의 날’로 정한 것이다.

올해에도 많은 다채로운 행사가 전국에서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독도 관련 역사적 의의도 기억될 것이다. 한편 이와 함께 동 칙령의 제정 배경과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이에 따라 부산 등 3개 항구가 개방되고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됐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개항장이 아닌 울릉도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울릉도 목재를 벌채해 육지로 반출하는 등의 범법 행위를 했다. 이 사실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자 고종은 1882년에 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해 상황을 조사한 후 1883년에 울릉도 개척을 지시한다.

한편,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입도는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 1869년에 한 일본인이 ‘대일본제국 송도(마쓰시마)의 느티나무 계곡’이라고 쓴 표목을 울릉도 사동에 세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이 왜 울릉도를 일본의 송도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경과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울릉도가 처음 일본에 알려진 것은 여말선초의 왜구를 통해서고 임진왜란 때는 기죽도(이소타케시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어 17세기 초·중반에 지금의 돗토리현 요나고 지역 어민들이 울릉도에 죽도(다케시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년 도해해 그 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울릉도로 오는 길에 있는 독도에는 송도(마쓰시마)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들의 울릉도 도해는 1696년 5월에 끝났다. 부산 동래 사람 안용복을 계기로 벌어진 조일 정부간의 울릉도 소속에 대한 논쟁 끝에 에도 막부가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에도 막부의 울릉도에 대한 조치는 독도에 대한 조치도 된다. 당시 독도는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요나고와 주변지역 주민 간에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인식이 형성된다. 즉 죽도는 조선에 줬으나 송도는 일본에 남았다고 하는 인식인데 그 송도의 지리적 실체를 따져보면 독도가 아닌 울릉도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에도 시대 말기에 보이는데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 정부 차원에서도 울릉도가 송도라는 말이 나온다. 메이지 2년인 1869년 당시 일본인이 울릉도에 대일본제국의 송도라고 쓴 표목을 세워놓은 이유는 이로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독도 전경 (사진=공감포토)
독도 전경 (사진=공감포토)

한편, 1889년 조일통어장정 체결 등에 따라 일본인의 조선 해안에서의 어업이 더욱 자유스러워졌다. 이에 일본인의 울릉도 입도도 많아졌고 조선인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1900년 고종은 다시 울릉도 조사를 실시한다. 조일 관료들의 합동조사였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동 조사단의 건의에 따라 1900년 10월 25일 제정되고 27일에 반포됐다. 종래 강원도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도 군수를 두는 한편 울도 군수가 울릉 전도 및 죽도와 석도(독도)를 관할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울릉도 침탈은 계속됐다. 1900년 이후 울릉도 또는 일본에서 독도로 가서 강치잡이를 하는 일본인이 생겼다. 이들 중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사람의 건의서를 명분으로 1905년 2월에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1월에 조선을 강압해 을사늑약을 맺는다.

우리는 지금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에 대한 것만 발췌해 봄으로써 더 큰 역사적 흐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칙령은 조선시대 이래 진행돼 온 울릉도 침탈에 대한 대한제국의 대응이었고 독도 침탈은 울릉도 침탈이 좌절했을 때 일본이 찾은 대안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칙령 이후 일본의 독도 편입, 을사늑약, 한일합병 등의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 구지 동 칙령의 내용을 언급하며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독도를 지키는 것은 결국 국력이다. 독도의 날이 이러한 사실을 함께 기억시키는 기념일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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