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층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는 도심 속의 도심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의 사대문 안에 위치했던 이곳에는 경복궁과 경희궁, 덕수궁과 같은 조선시대 궁궐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정치, 행정, 외교 및 언론 기관이 세워지기도 했던 이 지역은 조선과 구한말, 대한민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그야말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1920년대 동아일보 사옥으로 지어져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민미술관에 실감형 디지털 전통정원이 들어섰다. 국가유산청의 ‘미음완보, 전통정원을 거닐다’ 실감 전시이다. 이 전시는 한국 전통조경을 디지털로 정밀실측해 제작한 실감형 디지털 전통정원이다. ‘미음완보(微吟緩步)’는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의 「상춘곡(賞春曲)」 속 글귀로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걷다’는 뜻이며, 단순히 정원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교감하고 내면을 바라보는 심미적 과정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전통조경 실감형 콘텐츠는 국가유산청이 2021년부터 축적해 온 전통조경 디지털 정밀실측 데이터를 활용해 제작된 것으로, 그간 그래픽, 학술연구 등 일부 전문가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활용되던 정밀실측 데이터를 전시에 활용해 국민들이 한국 전통조경을 쉽게 이해하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의미 있는 시도이다.
전통정원이라는 실감형 디지털 콘텐츠를 체험하는 자리인 만큼, 많은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총 3부로 구성된 전시는 각각 1층과 2층, 3층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1층의 1부 ‘풍월주인, 자연에서 찾은 풍류’ 입구에는 명승 <지리산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에서 착안한 미디어 폭포가 조성되었다. 물길을 따라가보니 차경으로 즐기는 정원이 등장했다. ‘차경’은 주변의 경치를 끌어들여 감상하는 경관 연출 기법이라고 한다.
2부, ‘세외도원, 속세를 벗어난 별천지’에서는 별서정원을 구현한 미디어아트가 전시 중이었다. 국가유산청에서 구축한 별서정원 3D 스캔데이터를 활용한 별서정원 미디어아트는 2024년 10월,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먼저 공개돼 한국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관람객들은 전시실에 구비된 방석에 앉아 새벽 안개 속 동트는 윤선도 원림 세연정, 정오의 소쇄원, 명옥헌의 석양, 달빛 아래 임대정으로 이어지는 별서정원의 하루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 역시 속세에서의 시름은 잠시 잊고 도심 속에서 자연을 벗 삼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3부 ‘성시산림, 일상에서 찾은 자연’의 ‘왕의 안식처, 궁궐정원’ 미디어아트는 대표적인 도심 속 자연이자 궁궐정원인 창덕궁 후원의 사계절을 담았다. 창덕궁에 갈 때마다 예약이 마감돼서 못 들어갔는데(후원은 제한관람지역으로 창덕궁 입장객도 따로 예매를 해야 한다) 날이 풀리면 꼭 후원에 직접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스크린 속 창덕궁 후원의 사계는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마지막 장소 북라운지에서는 전통조경 보존, 관리 및 활용을 총괄하는 유일한 국가기관인 국가유산청이 발간한 도서를 보며 국민과 전통정원을 연결하는 국가유산청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제1회 대한민국 전통조경대전 사진공모 수상작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때 묻은 역사가 담긴 근현대 사진과 영상은 전통조경공간 복원정비 근거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전통조경 분야에서 최초로 개최된 국민 참여 공모전인 대한민국 전통조경대전을 통해 그동안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전통조경이 더욱 친밀해졌으면 한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미디어아트라는 장르는 상상도 못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하고, 이전에는 없었던 경험을 제공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디지털과 전통정원은 생각도 못 한 조합이었다.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이 만남은 도심 속의 도심, 서울 한복판에 힐링 정원을 선물했다. 아쉽게도 이번 전시는 짧게 마무리되지만 대한민국 전통조경대전과 그간 쌓아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상 속 한국 전통정원을 더 가까이 누리게 되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