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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함부로 새기지 말라

임철순 이투데이 이사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2016.01.11 임철순 이투데이 이사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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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매헌(梅軒) 윤봉길(1908~32) 의사의 유적지에 조성된 기록과 시설물에 오류가 많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순국 83주년 기념일(12월 19일)을 앞두고 지적된 내용이다.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생가가 복원돼 있고, 사당 충의사(忠義祠)도 세워졌다. 충의사 일대에는 2001년 윤봉길의사기념관도 건립됐다. 이에 앞서 2000년 기념관 왼편에 세워진 윤 의사의 어록탑에 틀린 게 많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무엇이냐’를 ‘무었이냐’로 잘못 표기했다는 지적을 받고 예산군은 ‘ㅆ’의 한쪽을 검은 흙으로 대충 메워 ‘ㅅ’으로 만들었다. 보조탑에는 윤 의사가 15세 때 쓴 학습관(學習觀)을 펼쳐 보인 옥련환시(玉連環詩) 7언절구에 원문의 ‘晴(갤 청)’을 ‘淸(맑을 청)’으로 잘못 표기해 놓았다.

더 우습고 큰 문제는 어록탑 맨 아래에 윤 의사가 아니라 탑을 만들 때 후원금을 낸 기업인과 종친·농협 관계자의 이름을 새긴 점이다. 그래서 윤 의사의 어록을 후원금을 낸 사람들이 한 말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어록탑 좌우에 놓인 책 모양의 월진회가와 월진회금언 역시 윤 의사가 쓴 것인데도 금언 아래에 ‘禮山郡守 權五昌’이라고 새겨져 있다. 

기관장이 되어 무슨 일을 하면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름을 새기는 행위는 마땅히 자제돼야 하며 설령 이름을 새긴다 해도 별도의 공간에 적절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고 겸손하게 직함만 남긴 사례도 있다. 서울 강동구의 일자산 해맞이광장에는 해맞이광장 준공비가 있다. 해맞이광장의 한편에는 둔촌동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된 고려 말 대학자인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의 시비도 조성돼 있다. 준공비의 내용은 이곳이 자랑스러운 지역명소로 길이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인데, ‘1994년 5월 21일 강동구청장’과 함께 글씨를 쓴 사람과 시공회사, 기술자문을 해준 곳이 새겨져 있다. 구청장의 이름을 새기지 않은 분별이 인상적이다.

강동구 일자산 해맞이공원 조성비.
강동구 일자산 해맞이공원 조성비.

둔촌 이집 선생 시비.
둔촌 이집 선생 시비.

한국인들은 산이나 바위 또는 명승지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좋아한다. 본인에게는 중요한 기록일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경승을 해치는 낙서에 불과하다. 공직자들이 재임 중에 각종 시설물에 남기는 이름은 그 자신에게는 공덕비일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국민이나 주민들의 세금으로 생색을 내는 자기자랑일 뿐이다.

해발 556m의 북한산 비봉에 서 있던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제3호)에는 추사 김정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진흥왕은 영토 확장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면서 동일한 성격의 비를 곳곳에 세웠는데, 다른 사람이 세운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가 순조 16년(1816)과 그 이듬해 두 차례 비봉에 올라 이 비석을 조사하여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내고, 비의 왼쪽 측면에 추사가 실사(實査)했다는 내용을 새겼다.

뒷날 김정희는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황초령비와 북한산 순수비의 비문을 고증한 논문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도 남겼다. 해박한 금석지식과 철저한 훈고정신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추사는 1천여 년 전에 세운 비석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데 망설이거나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그러나 북한산 순수비는 추사의 ‘낙서’로 오히려 더 빛을 발하게 됐다.

공직자들이여, 추사처럼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될 자신이 있으면 남의 비석과 기념탑에 이름을 새겨라. 청마 유치환의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에 나오는 대로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이니까. 

임철순

◆ 임철순 이투데이 이사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는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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