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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 라이프

2019.11.05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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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에 개봉한 영화 ‘소공녀’(감독 전고운). 관객은 6만 명에 불과했지만 네이버 영화 코너의 관람객 평에는 2,300개의 글이 달렸다. 공감과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는 게 감상 후기의 대부분이었다. 독립영화로서는 상당한 반향을 불렀고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주인공 미소는 저녁 무렵 싱글 몰트 위스키 글렌피딕 15년산 한 잔과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외에는 더 바라는 것이 없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다. 원룸 집세와 담뱃값이 오르자 자발적 홈리스가 돼 캐리어를 끌고 계란 한 판 들고 밴드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 5명의 집을 전전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명대사 세 개가 있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내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거야.”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마이크로해비타트(microhabitat)’다. 미생물이나 곤충의 미소(微小) 서식 환경을 뜻한다. 배우 이솜이 열연한 주인공 이름도 미소다. 정착이나 거주가 아니고 ‘서식’이다.

이 영화가 생각난 건 ‘트렌드 코리아 2020’이란 책을 읽으면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팀이 연말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출간하는 다음해의 소비 라이프 트렌드에 대한 책이다. 관심을 끌 만한 게 참 많은데 나는 ‘스트리밍 라이프’에 꽂혔다.

스트리밍(streaming)은 “음악이나 동영상 파일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내려받아(다운로드) 저장해서 듣거나 보지 않고, 인터넷에 연결된 상태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것”을 말한다. 물 흐르듯이 전송된다 해서 스트리밍이다. 다운로드와의 가장 근본적 차이는 저장 즉, 소유하지 않고 그냥 일회성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무소유다. 회원제로 ‘구독’하다가 언제든 수틀리면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스트리밍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대세가 돼가고 있다. 시작은 음악이었다. 카세트테이프나 CD는 과거의 이야기고, 이제 음원 파일조차 저장보다는 스트리밍에 자리를 넘겨주고 있다. 최근에는 영상 서비스로 크게 확산돼 세계 최대 유료 동영상 서비스인 넷플릭스의 국내 구독자는 엄청 늘어나고 있다. 한 달에 최저 9,500원만 내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같은 동영상 콘텐츠를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볼 수 있다. 넷플릭스는 1997년 비디오와 DVD를 우편이나 택배로 배달하는 서비스로 시작한 미국 업체다.

이미 거의 20년 전에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그 유명한 ‘소유의 종말’이란 책에서 소유의 시대가 가고 접속의 시대가 온다고 예견했다. 그는 소유의 반대는 무소유가 아니라 접속이라고 간파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age of access’, 즉 ‘접속의 시대’다.

소유가 아니라 경험한다는 개념의 스트리밍 라이프는 우리 일상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물건은 물론이고 집이나 사무실, 자동차, 서비스, 입고 먹고 가꾸는 것, 여가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넓어지고 있다.

스트리밍 기반의 생활은 단기 렌탈이나 구독(멤버십)으로 실현된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돈이 없어서 아예 그마저도 이룰 수 없는 완전한 노마드(nomad, 유목민)의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내 집 마련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 체험형 이동형 주거 공간이나 공유 주택, ‘위워크’ 같은 공유오피스가 인기다. 매매나 전세, 장기 임대가 아닌 단기 임대다. 하루도 좋고 1주일도 좋고 1년도 좋다.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서 공간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거주 공간의 디자인도 취향에 맞게 선택한다. 국내의 크고 작은 건설업계들이 이미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이런 집을 지었거나 계속 짓고 있다. 은퇴자들이 국내 도시에서든 물가가 비싸지 않은 해외 도시에서든 ‘한 달 살아보기’를 하는 유행도 스트리밍 트렌드다.

일본에는 이미 ‘어드레스 호퍼(address hopp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껑충껑충 주소를 뛰어다닌다는 뜻이다. 최소한의 짐만 가진 채 일정한 거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노숙자는 아니다. 비싼 집값이나 임대료, 주거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주택 소유나 장기 임대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변화된 업무 환경 때문에 가능하다. 인터넷선만 있는 곳이면 된다. 그들만의 커뮤니티도 있다. 게스트하우스나 에어비앤비도 있지만, 전국 곳곳에 빈 집이나 시골 가옥을 리모델링해 놓고 멤버십을 가진 회원이라면 언제 어디든 원하는 기간만큼 지낼 수 있게 하는 비즈니스가 일본에서는 성업 중이다.

하우스노마드, 잡(job)노마드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다. 평생 한 직장, 한 업종, 한 지역에 매여 살지 않고, 경쟁사회에 몸을 던지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과 일을 추구하는 노마드들에게 집은 애물단지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동차도 필요할 때만 공유하거나 월정액을 내고 마음에 드는 차들을 골라 바꿔 탈 수가 있다.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이 그런 상품을 이미 내 놓았다. 월정액만 내면 여러 제휴점에서 매일 위스키 한 잔을 마실 수 있고, 전문 소믈리에가 와인을 골라 배송해주고, 거실의 그림이나 꽃, 소파도 주기적으로 바꿔준다. 아침 식사나 세탁, 다림질, 셔츠 구매, 책, 화장품, 면도날, 심지어 양말에 이르기까지 이용자의 특성을 분석해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큐레이션 서비스가 상상 이상으로 젊은이들이나 독신 가구의 일상에 침투해 있다. 소비자는 의사 결정 비용과 선택 과정의 피로감을 덜 수 있다.

수십 년 전 세대만 해도 마이카, 마이홈이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대는 욕망은 큰데 경제적 여유는 따라가지 못한다. 인터넷의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는 그 타협점을 찾았다. 무엇을 더 많이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걸 경험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트렌드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가 이끌고 있다. 디지털 유목민으로 불리는 이 세대는 평생 17개 직장과 5개 직업, 15번의 거주지를 갖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경제의 패러다임이 ‘소비경제’에서 ‘공유경제(sharing economy)’로 가다가 여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해 ‘접속경제(acess economy)’, ‘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 또는 이용경제)’라고 부르는 트렌드로 옮겨타고 있다.

스트리밍 세대의 ‘행복학 개론’ 마지막 챕터 제목은 “행복은 소유보다 경험에서 온다”는 게 될 거다. 사는(buy) 것이 달라지면 사는(live) 것도 달라진다. 소유권보다는 사용권, 성능보다는 취향, 잘 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 되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 성취감보다는 만족감, 결과보다는 과정, 외양보다는 의미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장인 심리학자 최인철 교수는 ‘굿 라이프’(2018년)라는 책에서 ‘소확행(小確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확의(小確意)’도 있다고 했다. ‘한 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자’는 ‘YOLO(You Only Live Once)’만 있는 게 아니라, ‘한 번 죽는 인생 의미 있게 살자’는 ‘YODO(You Only Die Once)’도 중요하다고 했다. 맛있는 과일을 먹는 거보다 과일을 따는 행위에서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무소유 사상을 설파한 법정 스님은 이런 시대가 올 걸 예견하신 것일까. 모 재벌의 회장님은 오래 전 마누라 빼고는 다 바꾸라고 혁신을 외쳤는데, 정말 가족과 친구 빼고는 내 것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까.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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