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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이 가야금 가르치던 탄금대에 오르다

국립중앙도서관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충주 현장 탐방기

2019.06.18 정책기자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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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왔다. 일찍 깨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6월 15일, 아침 7시 20분까지 청량리역 여행센터로 가야 했다. 기차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지내는 날들은 기꺼이 더 살만했다.  

7시 15분에 도착한 청량리역엔 이미 함께 할 사람들로 북적였다. 떠날 차비를 마친 이들의 밝은 기운이 청량리역을 가득 채웠다. 책 속 인문학의 현장을 가 볼 수 있는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국립중앙도서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코레일 공동 추진)의 6월 탐방지는 충주다. 

터만 남은 법천사의 모습
터만 남은 법천사의 모습.
 

‘탄금대를 지켜라’를 주제로 삼국시대의 격전지였던 충주 지역의 유적 및 지역 명소를 전덕재 교수(단국대 사학과)와 함께 했다. 도시락과 물, 안내 책자가 담긴 꾸러미를 받아 들고 기차에 올랐다. 달리는 기차에서 먹는 도시락은 더 맛있고 든든했다. 인문열차 사랑방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를 듣고 1시간 반을 달려 원주에 도착, 다시 관광버스로 30여 분을 가는 여정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10분 가량을 걸었다. 풀과 나무로 가득한 세상은 공기부터 달랐다. 법천사지는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의 절터를 말했다. 지금은 마을이 들어섰지만 마을 전체가 절터였을 거라 추정했다. 법천사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넓은 절터와 지광국사 현묘탑비, 조각난 석물들과 당간지주 등이다. 

탑비를 중심으로 금당의 터가 3개나 있어 삼국시대의 탑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중요한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탑보다 불상이 중심이 됐다고 하니 불교 역사상 특별한 의미라 생각됐다. 

법천사지와 지광국사에 대해 전덕재 교수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법천사지와 지광국사에 대해 전덕재 교수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보살상, 연꽃 등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지광국사탑은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는 지광국사가 고려시대에 가장 존경받던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탑에 얽힌 우여곡절도 많았다. 일본인에게 밀수 됐고, 이후 반환돼 경복궁에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당시 포탄을 맞아 심하게 파손됐으며, 1962년 국보 101호로 등재된 후에도 대전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복원을 진행 중이다. 

말을 탄 고구려 군의 동상을 지켜보는 참가자들
말을 탄 고구려군의 동상을 지켜보는 참가자들.
 

남한강가 가금면 용전리 어귀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돌기둥 하나가 서 있었다고 한다. 두텁게 앉은 이끼 사이로 글자 같은 것이 보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 돌로 인해 마을은 오래전부터 입석마을로 불리고 있었다. 두 번째 탐방지 중원고구려비의 이야기다. 

1972년 충주에 대홍수가 있었고, 당시 넘어진 비석을 마을의 입구에 세워 놓았던 것을 1979년에 답사 중이던 충주의 한 문화재 동호회가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1981년 국보 제205호로 지정됐다. 돌기둥의 정체가 알려진 게 겨우 30여 년 전의 일이라는 거다.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비와 더불어 고구려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원고구려비전시관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비와 더불어 고구려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알 수 있는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 비석인 중원고구려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관이 바로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이다. 그 시절엔 충주를 중원이라 불렀기에 중원고구려비로 전해진다. 

삼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지닌 충주를 손에 넣는 나라가 전성기를 보냈다. 고구려는 70년이 넘도록 충주를 지배해 왔기에 그 업적을 기리고자 중원고구려비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비석에는 고구려의 강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총 528자가 새겨져 있지만 훼손이 심해 일부만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충주의 역사와 인물들을 볼 수 있도록 도성된 충주박물관, 국민들의 기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박물관의 특징이다.
충주의 역사와 인물들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된 충주박물관.


식사를 끝낸 후 중앙탑과 충주박물관이 있는 중앙탑사적공원으로 향했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공원은 탁 트인 공간에 박물관과 탑을 두고 있었다. 박물관과 탑을 본 후 총 25개의 조각 작품이 전시된 공원을 거닐며 산책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장소였다. 

충주박물관은 넓고 전시관도 많았다. 1관은 역사, 민속실과 불교미술품, 근현대 자료실이 있었고, 2관은 선사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명현실, 충주항쟁실로 구분돼 충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오백원 지폐와 미싱 등, 추억 속 물건들을 보며 아늑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물들을 통해 충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제 1전시관
유물들을 통해 충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제1전시관.


야외전시실은 중원문화권 내에 흩어져 있거나 충주댐 수몰지역에 있던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충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충주 시민들의 기증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앙탑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이라 불리는 탑평리 칠층석탑, 통일신라시재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높다.
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 중앙탑이라 불리는 탑평리 칠층석탑.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높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된 중앙탑의 정식 명칭은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탑으로 우리나라의 정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평평한 남한강가에 높은 토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리는 구조로, 아래 2단을 먼저 쌓고 그 위 7층의 탑신을 올려 수직 상승하고 있는 모습이다. 1916년 한 차례 보수를 마친 탑 주변 경작지에서 8각 연화대석이 남아 있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어떤 사찰이었는지 확인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1980년 중원문화권 설정을 위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확인된 누암리 고분군, 1983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 3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 사적 제 463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1980년 중원문화권 설정을 위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확인된 누암리 고분군. 1983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 사적 제463호로 변경 지정됐다.


다시 버스에 탑승한 우리는 누암리 고군분으로 향했다.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집결된 또 하나의 유적지인 이곳은 6~7세기경인 진흥왕 18년 당시 이곳에 살았던 신라 지배층의 집단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으로, 누암리 일대에만 230여기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무덤 중, 50호분에서 최대 규모의 유물이 발견됐으며, 철의 생산지답게 무덤 바닥에 철재를 깔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과거 많은 무덤이 있다고 해서 무지고개로 불렸던 주위엔 사과밭과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 향기가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 신립장군이 열두 번을 오르내리며 병사들을 독려하였지만, 패하게 되자 강에 투신자살하였다는 탄금대
임진왜란 시기, 신립 장군이 열두 번을 오르내리며 병사들을 독려하였지만, 패하게 되자 강에 투신자살했다는 탄금대.
 

마지막 탐방지인 탄금대다. 가야국의 우륵이 신라로 귀화하자 진흥왕이 우륵을 신라에 살게 했고, 청년들에게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치게 해 탄금대라 불린다.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고적지, 탄금대에 위치한 탄금정.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고적지 탄금대에 위치한 탄금정.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선 곳으로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탄금대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 패하게 되자 피난도 안 가고 있던 충주 시민들이 희생됐고,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했다.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6월의 탐방지 ‘탄금대를 지켜라’는 주제로 충주를 찾은 참가자들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6월의 탐방지 충주를 찾은 참가자들.
 

새벽 일찍 나선 사람들은 촘촘한 여정을 관심 있게 둘러보고,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어린 아들과 함께 한 모자부터 엄마와 딸, 중년의 부부와 친구, 청년 둘이 함께 온 팀도 혼자 온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탄금정에 앉아 탄금정으로 3행시를 지으며 집중하는 시간을 보낸 후 사랑방이라는 설문을 통해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 선정 이유를 잘 쓴 사람을 뽑아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인문열차에 올라보니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낯선 지역의 오래된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현장을 접하니 더 자세히 보였다. 수세기 전에도 사람은 살았고, 마을은 건재했다. 후세에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까 생각 하며 졸다가 눈을 뜨니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특별한 하루를 선물 받고 싶다면, 인문열차에 오르자. 꽉 찬 하루에 담긴 곳곳의 이야기가 근사하게 기억될 것이다. 




박은영
정책기자단|박은영eypark1942@naver.com
때로는 가벼움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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