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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벤치를 허하라

2019.08.29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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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강은 어느 계절이나 참 평화롭고 아늑하다. 꼭 봄가을이 아니더라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운치가 있다. 차창 밖으로 후딱 흘러가 버리는 풍경이 아쉽다. 유유자적하게 내 다리로 다리를 건너보면 어떨까.

실제로 그리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한강 다리들은 평균 1~1.5㎞로 길고 폭은 25~30m, 차로는 6~8차선인데 인도는 좁다. 무엇보다 발품을 쉬면서 경치를 감상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 벤치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이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한강 다리는 보행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하다. 보도가 넓은 잠수교나 쉼터와 자전거 전용길, 하부 전망대가 있는 광진교 정도를 빼고는 한강 다리들은 걷기에 대체로 불편하다.

다리 곳곳에 벤치를 놓는 게 여러 사고 위험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한강 다리들은 차량 통행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그냥 교통수단으로서의 다리일 뿐이다. 강남과 강북을 연결했다기보다는 정서적으로 단절시키며 격차를 고착화했다. 굳이 파리의 퐁뇌프까지 바라진 않더라도 한강 다리는 주변 풍경을 앗긴, 체온이 없는 삭막한 구조물이다. (한강에는 2021년에 한강대교 남단에 최초로 보행자 전용 공중 보행교인 ‘백년다리’가 들어선다. 조선 정조시대의 ‘배다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당선작이 최근 발표됐다.) 

나는 차를 갖고 다니는 게 더 귀찮아서 많이 걸어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가진 불만 중 하나가 바로 쓰레기통을 찾기 힘든 것만큼이나, 크고 작은 거리든 대형 빌딩이나 건물 앞이든 가로수 아래나 공터에든 벤치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벤치가 없다는 건 공짜로 머무르며 쉬거나 대화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거리로 나서면 무조건 걸어야 한다. 버스 정류장에는 대체로 벤치가 있지만 그곳은 편안하지 않다.

인문건축가로 유명한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해외여행을 가면 단위 면적당 벤치가 몇 개인지 세어본다고 한다. 미국 브로드웨이는 10m당 2개 정도로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보다 50배나 많다고 한다.

그의 책과 인터뷰에서 상당 부분을 빌리겠다.
“우리나라의 모든 거리는 움직여야만 한다. 앉으려면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 카페나 피시방,  찜질방, 노래방 같은 공간사업이 성업 중인 이유가 그거다. 문제는 누구는 4,000원이 넘는 스타벅스에 가고 누구는 1500원짜리 빽다방에 간다. 경제적 능력이나 세대에 따라 가는 공간이 달라진다. 그래서 추억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멀어진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들은 곳곳에 접근하기 쉬운 크고 작은 공원이 있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쉬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대도시 뉴욕은 가난한 샐러리맨이나 백만장자나 똑같이 싸구려 핫도그를 사들고 센트럴 파크에서 놀고, 도처에 있는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보면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쉰다. 우리나라 공원에는 노천카페 구경하기도 힘들다.

광화문 광장은 서울의 중심에 꽤 넓은 공간을 투자한 곳이지만, 외국 대도시의 광장 모습과 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이 모여서 편하게 쉬는 곳이나 약속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광장 주변에 다양한 개방형 상점들이 전무하고 출입이 제한적인 대형 건물만 줄지어 서있다. 광장에는 사람들을 유도하는 테이블과 의자, 나무그늘이 적다. 그러다보니 사회갈등을 봉합하는 시민의 광장이 아니라 사회갈등을 표출하는 시위와 집회의 삭막한 장소가 됐다(유현준 교수). 

나는 계단에 앉아 거리를 구경하며 쉬는 것도 좋아한다. 도시의 외부 공간에서 벤치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계단이다. 또 외국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로마의 스페인 계단 같은 명소가 서울에는 왜 없을까. 스페인 계단은 수백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거대한 벤치다.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영화 ‘로마의 휴일’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최근 로마 당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계단과 주변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계단에 앉거나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했다.) 파리 중심부의 오페라 극장 계단은 또 어떤가. 시민들의 약속 장소로, 관광객이 다리품을 쉬는 곳으로 이만한 명소가 없다. 계단은 층층이 눈높이가 달라서 도시와 거리를 조망하기도 좋다. 세종문화회관 계단보다 훨씬 낭만적이다.

지자체의 도시재생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벤치나 계단도 소재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가끔 본다. 작은 일 같지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네의 죽은 공터나 골목길 계단을 손쉽게 단기간에 바꾼 ‘포켓 공원’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화초 같은 간단한 조경이나 벤치, 벽화, 설치작품 등으로 소공원의 기능을 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정이 오고 간다.

순천시는 최근 도시에 휴식 공간을 더 만들기 위해 ‘도시재생 공공디자인 벤치 시민공모전’을 했는데 호응이 컸다. 창의적인 19개 작품이 선정돼 실제로 제작 설치됐다. 광주 동구는 주민들이 직접 나무 벤치를 만들어 설치하는 목공학교를 운영 중이다. 대구의 김광석 거리에는 기타 모양의 벤치들이 곳곳에 있다. 서울 창신동에는 이 동네에서 활동한 화가 박수근 벤치가 있다.

벤치는 공공적 목적도 있다. 서울 성북구는 보행이 힘든 주민을 위한 ‘휴(休)의자’를 많이 설치했다. 전신주나 신호등, 계단, 화단 등에 간단히 부착할 수 있게 디자인한 벤치다. 평상시에는 접어놓을 수가 있다. 서울 마포구 청사 앞에는 국내 최초로 사물인터넷기술(IOT)을 활용한 ‘미세먼지 저감 벤치’라는 게 세워져 있는데, 빗물을 저장했다가 벤치에 심어진 식물에 물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 벤치는 전국 지자체에 벤치마킹되고 있다고 한다. 벤치 모양도 천편일률적이면 앉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다.

도시는 점점 더 벽을 높이 세우고 소통을 막는다. 대형 아파트 단지는 그들만의 캐슬이고 대형 빌딩은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칠 수 있는 통로를 막는다. 30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외부인, 심지어 내부인끼리도 소통할 수 없는 구조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끝이다. 중정(中庭) 같은 구조로 1층을 터놓거나 공짜로 누구나 모여 쉴 곳을 만들면 참 좋을 텐데. 용산의 명소로 등장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나 교보문고나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의 넓은 독서 공간 같은 곳 말이다. 지역이나 사람들 간 경계는 모호해지고 격차는 줄 것이다.

도시의 주인은 자동차도 아니고 빌딩도 아니다. 과거의 재개발 사업은 오래 된 건물을 부수고 빌딩을 올리고 차도를 넓히는 것이었다. 도시재생은 말 그대로 도시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다. 그 속에서 호흡하는 주인은 사람이다. 제발 한 뼘 쉴 곳을 허하라.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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