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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탄생 100주년에 부쳐

2020.09.29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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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사표’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우리 현대사에 몇이나 될까. 세태와 타협하거나 시대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 학문과 예술에 평생을 정진하고, 국가와 민족에 공헌하고,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는 사람, 게다가 멋진 풍모에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파의 느낌까지 풍긴다면…

세태가 어지럽고 시대가 혼탁하면 더욱 그런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런 묘사에 전혀 부끄럼이 없는 이,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1920~1968)을 생각함은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기품’ 하나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지조’가 따라와야 한다. 그는 시업(詩業)을 떠나 ‘마지막 선비’라는 시대의 평가에 부족함 없이 길지 않은 생을 올곧게 일관하고 1968년 봄날에 떠났다. 12월 3일 그의 100세 생일이 곧 돌아온다.

지훈의 고향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이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곳에 영양군이 운영하는 깔끔하고 소박한 한옥인 지훈문학관이 있다. 지훈의 유품과 육필, 사진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문을 닫았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10월 17~18일에 탄생 백주년 기념 조지훈예술제가 열린다.

한양 조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크게 욕심 없는 가을 나들이에도 딱 좋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실마을 숲을 지나야 하는데, 이 숲은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마을 숲 대상을 받은 곳이다. 마을 주민들이 백년이 넘도록 지극 정성으로 가꾸어온 숲이다.

지훈은 고향과는 한참 떨어진 경기 남양주시 마석역 뒷산에 묻혀있다.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곳에 왜 잠들었을까. 그는 평소 자신의 어머니 곁에 묻히길 원했다. 사후 10년 만인 1978년에 모친과 나란히 누우면서 남양주시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이곳에서도 조지훈 문학제 등이 열린다. 마석역에는 그의 후학들이 세운 시비가 있다.

교과서에 실렸던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시 ‘승무’)를 아직도 암송할 수 있다. 1939년 당대의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 ‘고풍의상’에 이어 문장지에 실린 그의 데뷔작은 한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애송시가 됐다.

지훈을 두고 청록파 1인인 박목월은 ‘크고도 섬세한 손’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와 민족의식이 뚜렷한 큰 안목에 섬세하고 관조적인 자연의 서정을 지닌 지훈을 잘 가리킨 말이다.

조지훈을 두고 ‘지조론’을 뗄 수가 없다. 그는 해방 후 곧바로 시단의 지도자적 위치에 올라서고 고려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시인으로, 국학 연구자로, 당대의 논객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친일 행위에 가담하였지만, 지훈은 절필을 할망정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 20대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으나 일제에 끝내 협력하지 않았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의 송시 청탁을 받고는 “나는 누구든 살아있는 사람의 송시는 쓰지 않는다”라고 거절했다. 4·19혁명 때는 교수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5·16 세력이 독재의 길로 접어들자 강력히 비판했다. 정권의 입각 제의에 응하지 않고 사직서를 호주머니에 품고 다녔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에 나섰다. 시에서는 전통적 순수의 세계를 추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비판적 지식인의 삶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의 매운 기개와 차가운 지성이 집약된 ‘지조론’은 당대의 명문으로 꼽혔다. 지금 읽어봐도 고졸한 문체이지만 서릿발이 밟힌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다.”
 
지훈의 선비적 지조는 집안의 유전자다. 지훈의 집안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했다. 조광조의 후손인 조부 조인석(1879~1950)은 구한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을 지냈다. 6·25 당시 주실마을이 좌우 이념으로 문중끼리 갈등을 빚자 이를 개탄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선친 조헌영(1899~1988)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동경유학생 학우회장을 맡아 3·1운동을 기념하는 시위를 이끌다 체포됐다. 귀국 후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낸 민족주의자였고, 현대 한의학을 체계화한 선구자였다.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자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고 피란지인 대구에서 화병으로 사망했다.

6·25 때 서울대학생이던 지훈의 남동생은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소년 지훈에게 문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형 동진은 스물한 살에 병사했다.

어렸을 때부터 백일해를 입에 달고 살았던 지훈은 지천명을 넘기지 못한 채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면하기 직전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짧은 생애였기에 그가 남긴 흔적은 더 돌올하다.

그는 타계 4개월 전 죽음을 예감하듯 마지막 시가 된 ‘병에게’를 썼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시 일부)
 
그가 30년간 살았던 서울 성북동의 한옥은 허물어지고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다. 집 앞에는 조지훈 집터 표지석만 남아 있다. 집터 근처에는 ‘방우산장’이란 기념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지훈은 집을 ‘방우산장’이라 불렀는데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방목한다’는 의미다. 그곳 동판에 시 ‘낙화’가 새겨져 있다.

“꽃이 지기로 서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시 일부)
 
선생의 3남인 조태열(66) 전 유엔대사는 최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아버지 지훈을 회고했다.

“아버지는 당신 세대에 보기 드문 6척 장신에다 가르마 없이 모두 뒤로 쓸어넘긴 소위 리젠트 스타일의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 속의 시선은 항상 먼 하늘에 두고서 느린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 다니셨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시는 모습, 소매 끝을 슬쩍 걷어 올린 줄무늬 와이셔츠에 베레모를 쓰고 한 손엔 스틱을 쥔 채 성북동 산길을 유유히 산책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집안에 계실 땐 늘 한복 차림이었고 외출할 때도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다. 양복 차림에 종종 나비넥타이를 매고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고 나서면 영국 신사도 머쓱할 만큼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의 멋쟁이셨다.”
 
지훈이 세상을 떠난 후 한 주간지에 소개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주객(酒客) 명단’에서 그는 김삿갓, 황진이, 변영로에 이어 4등을 차지했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시며 문우, 제자들과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멋지게 보였던지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주흥이 오르면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술친구들과 한 소절씩 주고받으셨다.”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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