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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영원한 자유인이자 철저한 디아스포라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강릉 김시습 기념관

2020.09.28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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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인으로 철저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매월당 김시습. 아름다운 강릉 경포호 서쪽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영원한 자유인으로 철저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매월당 김시습. 아름다운 강릉 경포호 서쪽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노목개화심불노(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조선 초기 노 정승 허조가 ‘노(老)’를 운으로 시를 지어보라 하니 김시습이 지은 시다. 다섯 살도 안 된 꼬마가 ‘마음은 늙지 않은’ 반전의 미학까지 곁들이니, 역시 천재는 따로 있는가 싶다. 그 때 이미 ‘중용’과 ‘대학’을 익혔다고 한다. 신동으로 이름이 나자 세종이 친히 불러 시를 짓게 하였다. 시험을 맡은 문신 박이창이 어린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정자와 배가 그려진 병풍을 가리키며 시를 지어보라 하자 ‘소정주댁하인재(小亭舟宅何人在), 작은 정자와 배가 매어 있는 집에는 누가 사는가?’라고 썼다. ‘소정주’는 박이창의 호다. 좌중이 깜짝 놀랐고, 세종이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때부터 ‘오세동자’로 불려졌다.

강릉 경포해변 뒤편으로 베네치아의 석호처럼 아름다운 경포호가 있다. 그 남쪽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있고, 호수 서쪽에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강릉사람들의 말처럼 이곳이 우리 소설문학의 시원지라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서울 명륜동 출생이다. 본관이 강릉이고 외가가 강릉이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강릉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계유정난이 일어난 때가 그의 나이 21세. 3일간 통곡을 한 뒤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한다. 법호를 ‘설잠(雪岑)’이라고 스스로 지었다. ‘눈 덮인 등성이’라는 뜻이다. 그는 삭발을 했으되 수염은 기른 모습으로 다녔는데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기 위해서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기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했다.(계곡만필) 사람들은 그를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고 불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시신들이 길 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잡혀가 있었으니 누가 시체를 거두지도 못할 절박한 처지였다. 그 때 어느 승려가 시신들을 수습하여 노량진 남쪽 언덕에 묻어주었는데, 그가 김시습이라고 전한다.(연려실기술)

김시습은 ‘매월당집’ 23권과 시 2천여 편을 남겼다.
김시습은 ‘매월당집’ 23권과 시 2천여 편을 남겼다.

그는 관서지방을 유랑한 뒤 ‘유관서록’을, 관동지역을 둘러본 뒤 ‘유관동록’을, 호남지방을 유람한 뒤 ‘유호남록’을 엮었다. 그가 금강산 만폭동에 석각해 놓은 글이 있다.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하지만 나는 산에 올라서는 웃고, 물에 다다라서는 통곡한다.(登山而笑 臨水而哭)’ 세종과 단종을 그리며 산천을 떠도는 그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훗날 최남선이 ‘금강예찬’에서 ‘아름다움의 덤불이요, 기쁨의 더덕인 금강산에서 오직 한 군데 눈물로 대할 곳은 여기’라고 쓴 곳이 그곳이다. 설잠은 그렇게 전국을 떠돌며 20대를 보냈다.

그는 1463년 상경했던 길에 우리나라 첫 유발상좌(머리를 긴 세속의 불자)인 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 교정 일에 참여하는데 열흘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경주 금오산(남산), 폐허가 된 용장사로 찾아든다.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혹은 통음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서 있는 나무를 깎아 시를 써 놓고 읊조리다가 한바탕 통곡을 한 뒤에 다시 깎아 지워버리고, 종이에 시를 써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물에 던져버리고는 했다.

때는 1465년(세조 11), 김시습이 경멸하던 정창손과 김수온이 영의정과 공조판서에 오른다. 그는 한동안 울분을 삼키지 못했다고 한다.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는 그 무렵 쓰여진 것이다. 유교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연애의 사랑이야기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 등 5편을 담고 있다. 원본은 없고 고종 때인 1884년 간행된 목판본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것을 1927년 최남선이 국내에 소개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세조도 죽고 예종도 죽고 새 임금 성종이 문치를 표방하며 널리 인재를 구했다. 지기들의 상경과 벼슬권고가 이어졌다. 39세의 봄날 행장을 꾸려 상경한다. 마침 정승 정창손이 벽제소리를 울리며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있던 김시습이 거리로 뛰어나가 소리쳤다.

“너 이놈 그만 해 먹어라.”

정창손은 김시습을 보자 더 봉변을 당할까봐 못 본 척, 못 들은 척, 꽁무니를 뺐다고 한다.(사우명행록)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 .

권신 한명회가 한강 가에 화려한 ‘압구정’을 짓자 권신들이 이를 찬탄 아첨하는 시를 지었다. 한 현판에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고(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白首臥江湖)’라고 쓴 시가 있었다. 김시습이 붓을 들어 이렇게 고쳐 놓았다.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白首汚江湖)’ 한명회가 나중에 알고는 현판을 떼어버렸다고 한다. 벼슬에 뜻도 없거니와 그런 그에게 돌아갈 벼슬이 남아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는 다시 낙향하여 10여년 강릉 낙양 등지를 떠돌며 또다시 유랑의 길에 오른다. 50대에 이르러 그가 병든 몸을 의탁할 곳은 역시 절간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부여) 무량사. 1493년 그곳에서 병사했다. 향년 59세. 유해는 다비하여 절에 부도로 안치하였다.

‘백년 뒤 나의 무덤에 비석을 세울 때/ 꿈속에서 살다 죽은 늙은이라고 써준다면/ 거의 내 마음을 알았다 할 것이니/ 천년 뒤에 이 내 회포나 알아주었으면…’ 그가 임종에 즈음하여 남긴 「아생(我生)」이라는 사실상 절명시다.

김시습 부조상.
김시습 부조상.

영원한 자유인이자, 철저한 디아스포라(方外人)로 살았던 김시습. 시대의 모순에 몸으로 저항한 천재시인이었고 사상가였고,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한 생은 불행하였으되 고결한 인품과 굳은 지조는 후세에 길이 남았다. 율곡은 그의 전기에서 ‘심유적불(心儒蹟佛, 마음은 유교에 두고 행동은 불교)’이었으며 ‘백세의 스승’이라고 찬했다. 그의 시문집인 ‘매월당집’ 23권과 거기 수록된 2천2백여 수의 시와 ‘금오신화’가 전한다.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과 더불어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의 사후 289년이 지난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니, 살아서는 버린 벼슬을 죽어서 누린 셈이다. 김시습 기념관 뒤편으로 그를 모신 사당 ‘창덕사(덕원서원)’가 있고, 강릉시 성산면에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청간사’가 있으니 두루 둘러보면 좋을 일이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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