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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시대 민족의 밤하늘을 밝힌 ‘초인(超人)’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시인 이육사/경북 안동

2020.08.07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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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길다. 이 즈음 나락이 패고 과일에 단맛이 드는 때인데 금년은 윤달이 들어서 그런지 들의 생육이 늦다. 이육사를 찾아가는 길. 길은 멀고 구곡처럼 구불구불하다. 경북 영주에 들어서면서 온통 사과밭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고 했던 청포도 대신에 아이들 주먹만 한 풋사과들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있다.

이육사는 퇴계의 14대 손이다. 그의 생가 육우당과 문학관이 퇴계종택과 도산서원에 나란히 붙어있다. 조손(祖孫)은 진즉 흙이 되었으되 그 정신을 기리는 상징들이 함께 자리하며 우리에게 뭔가를 일깨워주고 있는 듯하다. 근처에 한국국학진흥원과 선비문화수련원이 함께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과 과거로 떠나는 여행을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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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를 지나온 시인·지식인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거나 친일 시 한편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 하물며 이육사(1904~1944)는 40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열일곱 번 투옥되었으니, 그 이름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육사는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보문의숙과 대구 교남학교를 거쳐 1925년 중국 북경의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해 의열단에 가입한다.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의 의열단(義烈團),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체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이원록(李源祿), 원기, 원일, 원조 등 4인이 체포된다. 원록이 육사의 본명이고 셋은 형제다. 어머니가 옥(獄)에 새 옷을 들여보낼 때 고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피 걸레 같은 옷을 대신 받아내었으며, 형제들은 서로 “나를 고문하라”고 대들어 일경을 곤혹스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진홍은 2년 뒤 일본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하루 전날 자결했다. 육사는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무혐의로 풀려난다. 그 때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1931년 대구격문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뒤 이듬해 중국 남경으로 떠나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학, 수료한다. 그 즈음 상해에서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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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육사 이름으로 첫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그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과 시나리오까지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1934년 조선혁명 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또다시 피검, 옥고를 치른다. 1937년 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으며 1939년 유명한 <청포도>, 이듬해 시 <절정>을 문장지에, <교목> 등을 인문평론에 발표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무릇 유언이라는 것을 쓴다는 것은 팔십을 살고도 가을을 경험하지 못한 속배(俗輩)들이 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 시를 생각는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나에게 무한히 너른 공간이 필요로 되어야 하련마는 숫벼룩이 꿇어앉을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내라, 그런 화려한 팔자를 가지지 못한 덕에 나는 방안에서 혼자 곰처럼 뒹굴어보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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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계절의 오행’ 부분이다. 유언은 팔십을 살고도 가을을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것, 시는 이며, 숫벼룩이 꿇어앉을만한 땅도 없는 내가 곰처럼 뒹구는 것. 시인이며 투사이고, 로맨티스트이면서 아나키스트 같은 느낌을 준다. ‘숫벼룩이 꿇어앉을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나’는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시 <절정>의 그 대목,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나’를 연상케 하며, 조국을 잃은 깊은 통증이 그대로 전해온다.  

1943년 북경으로 돌아갔던 육사는 그해 7월 어머니와 맏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하다 피검되어 또다시 투옥되었고 이듬해 1월 북경 감옥에서 순국했다. 친척의 딸인 이병희가 시신을 거두었고, 동생이 유골을 들여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1960년 원촌에 이장했다. 육사는 생애를 통틀어 36편의 시밖에 남기지 않는다. 시인이기에 앞서 독립투사였던 그는 난국에 처하여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으며, 암흑의 시대 민족의 밤하늘을 밝힌 ‘초인(超人)’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광야>는 그의 사후에 발표된 ‘절명시(絶命詩)’ 같은 것이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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