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콘텐츠 영역

오늘도 한 대 맞았다, 백팩에

2020.01.31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인쇄 목록

오늘도 제대로 한 방 맞았다. 혼잡한 시간대에 탄 서울지하철에서다. 간신히 올라탔지만 몸을 돌리기조차 힘들었다. 운이 없었나 보다. 키가 190㎝가 넘는 젊은이와 정장 차림의 여성 사이에 끼었다. 죽을 맛이다. 남자는 사각형 모양에 모서리가 딱딱한 꽤 큰 백팩을 메고 있었다. 그 물건은 정확히 내 얼굴에 위치했다. 하지만 나는 내 등에 바짝 붙게 된 여성에게 신경이 더 쓰였다. 오해받을지 모르니 몸놀림 손놀림을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한 순간, 눈에 번개가 번쩍 일었다.

키 큰 젊은이가 내리면서 공간을 확보하느라 몸을 돌린 것이다. 얼굴이 얼얼했다. 안경은 거의 떨어지기 일보직전. 나도 모르게 “헉” 비명을 질렀으나 이어폰을 꽂은 그 청년은 내가 맞은 줄 몰랐다. 그는 사람들을 비집고 내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승객들을 밀치며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도처에 백팩이 가로막아 포기했다. 넘을 수 없는 백팩산성이었다.

몇 달 전에 이어 벌써 두 번째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붐비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생각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문제를 잘 알면서도 왜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것일까. 나 같은 봉변을 겪은 사람이 하나둘도 아닐 터다. 지하철당국이 나름대로 캠페인을 벌였다는 뉴스도 들었다. 언젠가 역구내에서 백팩을 앞으로 메자는 포스터도 본 적 있다.

나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인데 백팩을 앞으로 멨거나 손에 든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 청년을 어쩌다 보면 반듯하게 자란 거 같아서 딸을 소개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하철 3대 민폐족으로 쩍벌남, 화장녀와 함께 백팩남이 오르내린 지 오래다. 백팩은 시들지 않는 인기 아이템이다. 내가 80년대 중반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프랑스 여성들이 세련된 옷차림에 턱하니 백팩을 멘 낯선 모습을 보고 문화충격을 받았었다. 우리 사회에는 아마도 2000년대 넘어와서 백팩 패션이 퍼진 걸로 기억한다.
 
정장 차림의 백팩 신사도 이젠 낯설지 않다. 장관님도 백팩 메고 출퇴근하시고 어느 정치인은 백팩에 운동화 신고 민생대장정을 하셨다. 백팩은 휴대폰 공급과 비례해 더 늘어난 것 같다. 왠지 젊어 보이고(젊은이 코스프레 혐의도 있다) 세련돼 보이기도 하지만,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폰 갖고 시간 때우는 거 외에는 별 할 일 없는 엄지족에게 백팩은 손 해방의 일등공신이다.   

포털 검색창에 ‘지하철 백팩’이라고 쳐봤다. 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블로그와 포스트에는 백팩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는 원망의 글이 도배가 돼있다. 당한 이야기는 뭐 비슷비슷하다. 백팩에 화장한 얼굴이 묻혀버린 한 여성은 “올해는 정말로 운전면허 따야지”라고 결심했다. “아침에 백팩 메고 탄 남자 XX고 싶었다”는 저주도 있다. 가장 심한 건 백팩에 꽂힌 등산 스틱에 눈이 찔렸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흉기 수준이다.

뉴스에도 백팩 에티켓에 대한 기사들은 많았다. 대도시의 지하철 운영 당국도 여러번 캠페인을 한 거 같다. ‘백 허그(Bag Hug)’니 ‘백팩 허그(Backpack Hugs)’니 하는 참신한 이름의 캠페인이 눈에 띈다.

외국에서도 백팩이 사회문제가 됐나 보다. 프랑스 지하철당국은 2013년 지하철에서 백팩을 멘 사람을 ‘거북’으로, 무임승차하는 사람을 ‘개구리’로,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올라타는 사람을 ‘물소’로, 지하철 좌석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을 ‘멧돼지’ 얼굴로 묘사한 유머러스한 캠페인을 벌였다. 외국 여행을 한 사람들이 쓴 걸 보니 미국이나 일본, 싱가포르, 유럽 등지에서는 백팩을 내려놓거나 앞에 메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 도시들의 출퇴근 지하철도 서울만큼이나 붐비는지는 모르겠다.

서울지하철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딱히 백팩 예절 캠페인이나 보도자료는 없었다. 출퇴근 시간대에 안내방송이 필요하다, 객실 내 선반을 자꾸 없애서 백팩을 놓을 곳이 없다는 시민 의견이 보였다.

우리 대중교통 문화는 꽤 개선됐다고 본다. 임산부 석이나 노약자 석에 잘 앉지 않는다. 줄서기도 잘 하고, 계단 우측통행도 잘 지킨다. 그런 태도는 질서에 가깝다. 그런데 백팩은 교통질서가 아니라 순전히 타인에 대한 배려 문제다. 백팩은 아무래도 젊은 남성이 많이 멘다.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눈치면 백팩을 멘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앞으로 가방을 메면 창피한 걸까? 잠깐이라도 내려서 손으로 들고 있기엔 무거운 걸까?

백팩이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봉변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냥 시선이 불편한 정도가 아니다. 직접 몸에 위해가 되고 하루를 시작하고 귀가하는 출퇴근 기분을 망칠 수 있다. 백팩 문제는 십년도 더 전부터 지적됐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프로불편러들이 더 외쳐대야 사람들 의식이 개선되려나. 객실 안에서 백팩 문제로 남녀가 대판 싸움이 벌어진 리얼 동영상이 인터넷에 나돌면 관심을 가지려나? 역사나 객실에 안내방송이 수시로 나오고 포스터가 이곳저곳에 붙으면 나아지려나? 유관단체나 언론의 캠페인이 많아지면 좋아질까? TV에는 시청률 높은 갖가지 예능 체험 프로그램들이 많던데…. 어떤 일이 벌어져야 사회적으로 이 문제가 환기될까?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