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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광장’에 서서

2019.11.27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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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전시회에 자주 다니는 형편은 못 된다. 그런데 이 전시만은 여유 있게 꼭 보고 싶어 평일 날을 잡았다. 서울대공원 뒤편에 붙어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다. 이곳은 사실 대중교통으로는 좀 불편하다. 걷기엔 조금 멀어서 4호선 대공원역에서 미술관까지 2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가 운행한다(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을 잇는 무료 아트셔틀버스도 하루에 네 차례 있다). 하지만 나는 대공원 매표소에서 1,500원짜리 코끼리 열차를 타고 가는 재미를 즐긴다. 대공원 경내와 넓은 호수가 철마다 꽃과 단풍과 설경으로 눈호강을 시켜주기 때문이다. 절정을 막 넘어가는 단풍과 이별했다.

과천관은 사실 그 접근성의 단점을 보상해주는 괜찮은 점이 많다. 부산하고 시끌벅적한 도심 미술관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동물원 옆 호젓한 이 미술관이 제격이다. 앞으로는 탁 트인 관악산, 뒤편으로는 높은 청계산을 이고 있는데다 뒷마당의 넓은 조각공원, 미술관 앞 휴식 공간도 운치가 있어 사색과 힐링에 그만이다. 혼자 가야 어울리는 미술관이다. 대공원에서 운영하는 치유의 숲, 호수 둘레길, 식물원, 장미원, 동물원은 덤이다. 미술관 내 레스토랑 가성비도 좋은 편인데 나는 만 원도 안 하는 여기 크림 스파게티를 좋아한다.

각설하고 전시 이야기다. 전시 이름은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다. 1969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 기획전이다. 전례 없이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동시에 전시를 하는데, 덕수궁관에서는 1900~1950년대, 과천관에서는 50년대부터 현대까지의 미술을 다룬다. 서울관은 2019년을 사는 우리에게 “광장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으로 구성한 소규모 전시다.

3개관에서 300여 명 작가의 500여 점에 가까운 작품과 자료 수백 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그중 과천관 전시가 가장 규모가 큰데 200여 명 작가의 작품 300여 점이 걸렸다. 교과서에서나 봄직한, 평소 보기 힘들고 앞으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을 상당수 마주할 수 있다.
 
이 기획전은 흔히 접하는 미술 사조나 화풍 중심이 아니라서 미술을 잘 몰라도 괜찮다. 역사의식이 있고 정치사회 변혁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더 반가울 거다. 전시는 근현대 연대기를 따라간다. 19세기 말 개화기부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모더니즘, 해방 전후, 한국 전쟁, 폐허 복구, 국가주도 개발, 산업화, 민주화운동, 서울올림픽, 세계화, 고도성장과 대중소비문화, 경제위기, 밀레니엄 도래와 신자유주의, IT와 인공지능 시대로 이어진다. 미술은 그 시대의 가장 진솔한 소묘라고 한다. 어찌 보면 미술이 문학보다 시대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형상화한다.

워낙 대형 기획전시라서 아무리 국립이지만 관람료가 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2,000원이었다. 나는 미술평론가는 아니므로 전시 자체의 콘셉트나 작품 구성에 대해 평할 만한 위인은 못 된다. 다만 한국 근현대 미술 대표 작가의 대표작을 어느 정도는 망라한 이 정도 전시는 적어도 앞으로 10년 안에는 보기 어려울 거라는 점에서 놓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세기에 걸친 미술 사조도 일별할 수 있지만, 교육적 관점에서도 미술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학생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점을 배려했는지 만 24세 이하와 대학생은 무료다.)

이쾌대 ‘해방고지’ 1948년 작. 광복의 환희와 혼란, 희망이 보인다.
이쾌대 ‘해방고지’ 1948년 작. 광복의 환희와 혼란, 희망이 보인다.

전시 제목은 작년에 돌아가신 최인훈 작가의 대표작 ‘광장’에서 따왔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장’은 혁명과 민주화 시위, 노동자 투쟁,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시대적 의미가 있다. 한국의 근대가 갇힌 밀실(개인)에 가깝다면 현대는 열린 광장(집단, 사회)이다. 마지막 왕조와 일제 강점, 전쟁과 분단, 억압과 자유, 빈부 격차의 심화를 겪은 한반도에서 개인과 사회는 늘 부딪쳐 왔다.

전시는 ‘1953년 9월 판문점 회담’이라는 작품부터 시작한다. 휴전 회담장을 스케치한 풍경이 쓸쓸하다. 러시아와 평양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로 얼마 전부터 국내서 새롭게 존재를 조명받고 있는 변월룡(1916~1990) 작이다.

이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세 작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를 만난다. 대표작이 모처럼 각 서너 점 이상 옹기종기 나와있어 참 기쁘다. 이중섭의 ‘가족’ ‘부부’,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이 그림들 중 하나만 보기 위해서라도 미술관 나들이가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어디서…’는 며칠 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100억을 넘어 132억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추상 점화 ‘우주’와 뉴욕에서의 제작 시기와 기법이 같은 대작이다. 귀에 익은 박고석, 박서보, 박래현, 장욱진, 서세옥, 유영국, 이숙자 작품도 있고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는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도 볼 수 있다.

중앙홀에 들어서면 정면에 대형 걸개그림 ‘노동해방도’와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시선을 압도한다. 작가 최병수가 제작한 흑백의 강렬한 톤으로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직접 걸린, 낯은 익었지만 처음 보는 것이다. 오윤의 민중미술 판화들, 박생광의 화려한 채색화 ‘전봉준’도 걸려 있다. 80년대 신문을 똥을 닦는 용도로 모욕한 임옥상의 ‘신문’에 눈길이 멈췄다.

박정희 정권 치하 ‘동백림사건’으로 수감됐던 작곡가 윤이상과 재불화가 이응노의 흔적도 있다. 수인번호 5527번 윤이상이 서울구치소에서 딸에게 보낸 1968년 11월 1일 직인이 찍힌  편지는 눈물겹다. “나는 너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읽는다…나는 사과를 먹으며 찍은 네 사진을 참 좋아하는데 아침저녁으로 그 사진에 뽀뽀를 한다…” 그의 육필 악보, 이미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두 작가의 구속에 대한 외국 언론 보도도 전시됐다. 이응노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그 유명한 연작 ‘군상’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작. 점점마다 그리움이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작. 점점마다 그리움이다.

사진으로는 전쟁에 두 팔을 잃은 군인이 벙거지 모자를 쓰고 고개를 떨군 채 ‘구직’이란 푯말을 들고 서있는 임응식의 유명한 작품 ‘구직’, 50~60년대 명동 거리 사진 연작, 사진작가 오형근의 잘 알려진 ‘아줌마’ 연작에 발걸음이 멈춰진다. 현대에 오면서 이불과 최정화 서도호 등의 설치, 소수자와 이주자 문제, 페미니즘 등을 다룬 작품들을 전시했다. 전시장을 나가면서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초청작인 김홍석, 김소라의 비디오설치 ‘만성 역사 해석 증후군’을 본다.

작품이 아니더라도 전시된 자료도 볼 만한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같은 당대의 수준 높은 잡지들, 초창기 산업디자인과 TV 자동차 광고, 도시개발의 흔적들, 올림픽 포스터 들도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다. 

과천관에 머물지 않고 덕수궁관 전시까지 봐야만 근현대사를 관통할 수 있다. 덕수궁은 시내한가운데라 일찌감치 갔었다. 여기 전시는 19세기 말 개화기부터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해방, 성 불평등의 시대 한가운데 서 있던 사람들과 작품을 보여준다. 일제 하에서 예술로 민족혼을 강조한 작품들, 민족투사들의 지조와 절개가 의연한 초상화 앞에 서면 뭉클하다. 근대기 신문과 문예지, 연극과 영화 자료 등 시대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장을 풍성하게 해준다.

덕수궁관에서의 백미는 단연 이쾌대다. 그 유명한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과 ‘군상1-해방고지’, ‘군상IV’을 마주 할 수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평양을 택한 이쾌대(1913∼1965)는 변월룡만큼 과거에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2015년 현대미술관의 전시 ‘거장 이쾌대-해방의 대서사시’를 즈음해 그는 한국 미술의 절대적 대가로 인정받았다. 

‘광장’ 전시장은 우리 앞 세대에게 바치는 헌화와 추도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작가뿐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 민초와 민중과 시민, 곡절과 시련과 극복과 도약의 근현대를 헤쳐간 이름 없는 단역과 조연을 소환했다. 어떤 그림들 앞에서는 눈물이 났고, 탄성이 터졌고, 엄숙해졌다.

작품들 앞에 서면 역사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는 느낌이다. 한국의 지난 120년과 2019년 늦가을, 지금의 한국 사회, 그리고 밀실이 아닌 광장에 선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념 대립에서 벗어나 중립지대에서 이상향을 찾고자 했으나 태평양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을 생각한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전시라서 관람을 권하고 싶다. 과천관은 내년 3월 29일까지, 덕수궁과 서울관은 내년 2월 9일까지 한다니 아직 많이 남았다.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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