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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리토미슐 성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체코/리토미슐(Litomyšl)

2018.12.19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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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프라하에서 약 160킬로미터 동쪽에 위치한 리토미슐은 인구 1만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고 아담한 도시이다. 옛날 한때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의 아름다운 옛 시가지 모습은 오늘날에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중심 광장은 리토미슐이 낳은 가장 위대한 아들에게 바쳐져 ‘스메타나 광장’이라고 불린다. 스메타나는 체코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였다.

이 광장에서 약 500미터 동쪽에 있는 언덕 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리토미슐 성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성은 10세기의 중세 성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세운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르네상스 양식의 리토미슐 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르네상스 양식의 리토미슐 성.

당시 중부유럽 귀족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을 좋아하여 자신들의 궁을 짓기 위해 르네상스 양식과 기술을 전적으로 도입했으며 이탈리아로부터 건축가들을 직접 불러들이기도 했다. 이 성도 마찬가지로 브라티슬라프 폰 페른슈타인(Vratislav von Pernstein) 백작이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초빙해 1568에 착공, 1581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 성의 외관은 마치 큰 벽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눈속임’이다. 즉, 돌을 쌓아올린 게 아니라 입체감이 있게 즈그라피토(sgraffito) 기법으로 처리한 것인데 ‘즈그라피토’는 이탈리아어로 ‘긁어낸’이란 뜻으로 벽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마르기 전에 긁어내면서 바탕색이 드러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 성의 외관은 이 기법으로 8000개가 넘는 ‘가짜 돌’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각 ‘벽돌’마다 꽃, 식물, 상상의 동물 등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중세의 엄격한 종교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새롭고 자유스런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의 외부는 요새처럼 우람한 느낌을 주면서도 마치 항상 축제가 열리는 궁전처럼 화려하게 보인다. 성 안에 들어서면 널찍한 중정이 펼쳐지고 중정 둘레는 3층으로 된 아케이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당히 개방된 느낌을 주어서 마치 햇빛이 많은 나라 이탈리아의 건축을 옮겨놓은 듯하다.

리토미슐 성의 아케이드 중정. 이탈리아의 건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리토미슐 성의 아케이드 중정. 이탈리아의 건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1층은 로마제국 수도교 같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아치, 2층은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토스카나 양식의 기둥이 받치는 날렵한 아치, 3층은 여성적인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받치는 더욱 가벼운 느낌이 드는 아치이다.

사실 현존하는 르네상스 건축물 중에서 이처럼 아케이드로 구성된 예는 극히 드물다. 이 성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는 18세기 말 바로크 양식의 극장. 관객석은 150석 정도로 아담한 크기이다. 이런 바로크 극장은 이곳을 포함 현재 유럽에서 모두 5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1830년 10월, 6살짜리 꼬마가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초대된 귀빈들을 놀라게 했다. 이 신동의 이름이 바로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그의 아버지 프란티셰크 스메타나는 리토미슐 성에 딸린 맥주양조장 관리인이었다.

그는 리토미슐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에 있는 도시 흐랄레쯔 크랄로베(Hradec Králové) 출신으로 일찌감치 맥주사업에 손을 댔다가 1823년에 이 양조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성은 유력 귀족가문인 발트슈타인 가문의 소유였다.

리토미슐 성 바로 옆 맥주 양조장 건물에 딸린 스메타나의 집.
리토미슐 성 바로 옆 맥주 양조장 건물에 딸린 스메타나의 집.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양조장 건물과 붙어있는 집 안에서 1824년 3월 2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현악사중주에서 연주하기도 했기 때문에 어린 스메타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스메타나가 8살이 되던 해에 스메타나 가족은 남부 보헤미아의 인드르지후프 흐라데쯔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지역에서 한 세대 후에 구스타프 말러가 태어나게 된다.   

스메타나 광장 북쪽면에 세워진 스메타나의 동상
스메타나 광장 북쪽면에 세워진 스메타나의 동상

그런데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서 체코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기 때문에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체코어를 말하긴 했지만 영업할 때와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만 썼을 뿐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스메타나는 나중에 성인이 될 때까지 모국어인 체코어가 서툴렀다.

그가 체코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이미 30살이 넘었을 때였으니 그의 체코어 이해력이나 구사력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코의 역사, 영웅담, 전설, 민속 등과 같은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첨가시키거나 체코의 풍경을 표제로 하는 등 체코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대표작은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오페라 <팔려간 신부>, 현악 4중주 <나의 삶으로부터> 등을 먼저 꼽는다. 그의 음악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체코 국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며 그들 마음속에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불길이 타오도록 했다.

매년 6월이 되면 리토미슐에서는 스메타나 오페라 페스티발을 개최되어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몰려든다. 이들의 발걸음은 먼저 음악적인 낭만과 역사적인 마력이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스메타나의 성지’ 리토미슐 성으로 향한다. 이 성이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둘째로 치더라도.

* Litomyšl은 현지 발음에 따라 ‘리토미슬’이 아니라 ‘리토미슐’로 표기했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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