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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불안감 해소, 가격리스크 완충장치 도입해야

이정환 GS&J인스티튜트 이사장 2019.11.11

이정환 GS&J인스티튜트 이사장
이정환 GS&J인스티튜트 이사장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도국 지위 여부는 각국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기선언’ 방식에 따라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개도국 지위를 적용받아왔다. 그러나 미국이 올 2월 개도국 지위를 결정하는 4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이 기준에 해당하는 나라는 10월말까지 개도국 지위 포기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우리나라는 이 요구에 응하여 다음 농업협상에서 개도국 지위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개도국 지위가 WTO의 파고를 막아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해왔던 농민들은 이런 상황 변화가 농업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가격리스크의 실체

농업 통상문제의 핵심은 시장개방에 따른 가격리스크의 실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리스크를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에 있다. 

그렇다면 먼저 개도국 지위 졸업이 농산물 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1995년에 발효된 WTO 농업협정에 따라 모든 회원국들이 관세·보조금 감축 등을 이행한 후 현재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우리나라가 지금 개도국 졸업을 선언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새로운 농업협상이 타결되고 우리나라가 선진국 규정을 적용한 협정에 서명해야 그때 비로소 개도국 졸업 선언의 효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까운 장래에 새로운 농업협상이 타결 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새로운 농업협상이 없으므로 이번 선언에도 불구하고 개도국 특혜를 중단할 기회 자체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점에서 특별한 대책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격리스크 트라우마

그러나 새로운 농업협상이 조기에 타결되거나 선진국 그룹만의 새로운 무역기구가 탄생하고 우리나라가 가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 예상 밖의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치명적 위험은 비록 확률이 매우 낮아도 불안감을 넘어 공포감을 형성하듯이 농업인은 확률을 떠나 개도국 특혜 중단에 대해 강한 불안감을 느끼고, 반발하게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원전, 초기 광우병, 신종 바이러스 질병, 강력 범죄 등에 대한 공포감, 대응태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농민들은 시장개방에 따른 가격리스크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989년 BOP(국제 수지보호) 졸업, 1995년 WTO 출범, 2005년 FTA시대 개막으로 세계사상 유례없는 숨가쁜 농산물 시장 자유화가 이뤄져 소고기, 오렌지 등 농산물 총수입이 2.1배 증가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와 농가의 투자 확대로 농업생산은 21%나 증가했다.

지난해 미국산 농식품 수입액이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3월 28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7년, 농식품 교역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산 농식품 수입액은 93억7000만 달러로, 한화 환산 시 10조6400억원에 달했다. 보고서는 2012년 발효한 한미 FTA가 이행 7년차를 맞아 관세가 줄어든 것과 국내 육류 소비 증가,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수출선 전환 등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해 미국산 농식품 수입액이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7년, 농식품 교역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산 농식품 수입액은 93억7000만 달러로, 한화 환산 시 10조6400억원에 달했다. 보고서는 2012년 발효한 한미 FTA가 이행 7년차를 맞아 관세가 줄어든 것과 국내 육류 소비 증가,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수출선 전환 등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 결과 소비자물가는 82% 상승하는 동안 농산물 가격은 39%만 상승해 농업생산이 증가했음에도 농업 실질소득은 무려 40%나 감소했다. 이것이 모든 농업문제의 배경이 됐고, 이같은 경험이 수입증가와 가격하락에 대한 농가의 트라우마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미 53개국과 체결한 FTA 이행으로 관세 감축과 TRQ(저율관세할당물량:정부가 허용한 일정 물량에 대해서만 저율 관세를 부과하고,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 증량이 2030년경까지 지속될 것이다.

또한 비관세 장벽에 대한 국제규율이 강화돼 동식물방역법에 의해 수입을 규제하고 있는 과수, 채소, 축산물에 대한 단계적 국가별 수입허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다양한 농산물 수입이 증가하면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식품수입 증가가 촉발하는 수요대체와 이에 대응하는 농가의 생산대체 사이에 단기적 미스매치가 발생해 품목별 수급이 어긋나고 가격이 급등락하는 현상이 다반사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개도국 특혜 중단에 의한 가격 리스크가 겹쳐지면 마치 태풍 두 개가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 파괴력이 훨씬 더 커진다는 ‘후지와라 효과’와 같은 결과가 농업에 나타날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농가는 개도국 지위를 농업보호의 마지막 버팀목으로 인식해 왔으므로 그 특혜 중단 선언은 가격 리스크에 대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자극했다고 할 수 있다.

가격리스크 완충장치

가격리스크 문제를 이상과 같이 인식했다면 이제 정부가 이 리스크를 어떻게 분담해 농가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논해야 한다.

선진국 농정의 핵심은 가격리스크 완충장치를 운용하는 것이다. 미국은 1930년대부터 중요 농산물에 대한 가격지지 장치(비상환 융자제도), 1970년대부터는 기준가격과 시장가격과의 차액을 보전하는 장치(부족분지불제, CCP, PLC 등)가 농정의 핵심이 돼왔다.

EU는 1950년대부터 농산물 가격지지 장치(부가금 제도), 1990년대에는 기준가격 보전장치(보상직불제)가 공동농업정책의 중심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융자·보조사업에 의한 투자지원 중심의 설계주의적 농정이 지배했다.

우리나라도 개도국 특혜중단 선언을 계기로 선진국형 가격리스크 완충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중요 농산물별 최근 평균가격을 기준가격(reference price)으로 설정하고, 시장가격이 이보다 낮아지면 기준가격과 차액의 85% 내외를 농가에 직접 보전하는 제도이다.

이 때 당년 생산과 연계되지 않는 ‘생산 비연계 방식’, ‘객관적 기준에 따른 기준가격 설정 규범’을 도입해 특정작물의 과잉생산을 차단하도록 한다. 가칭 ‘농업경영위험 완충을 위한 가격변동대응직불에 관한 법률’을 조기에 제정해 제도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

작물별 가격 리스크가 축소되면 경영리스크가 완충됨은 물론 작물별 재배면적 안정에 기여해 농가의 투자와 혁신이 촉진될 것이다.

가격변동대응직불은 농업의 환경·생태·경관 가치 제고를 위한 공익형 직불과 함께 선진국형 농업정책의 양축을 형성해 상호 시너지 효과 발휘함으로써 농민과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개도국 특혜중단 선언은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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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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