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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장 유감

2018.12.20 한기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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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금만 지나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댈 것이다. 연하장의 공습이다. 나한테도 수십 통 이상은 오는 거 같다. 지우기 바쁘다. 만난 지 너무 오래돼 이름과 소속조차 가물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 명함 한 장 교환한 적이 있겠지. 저장되지 않은 번호한테서도 연하장은 온다. 그건 대체로 의원님들이다. 바쁘신 의원님이 보낼 리는 없을 테고 비서들만 고생시켰겠지. 일면식도 없는 의원님이 내 번호를 어찌 알았을까. 경찰은 연하장 스미싱 주의보를 내렸다. 새해 첫 날 꼭두새벽에는 일출을 찍은 장엄한 사진과 함께 연하장이 날아온다. 참 부지런하다.

휴대폰의 진화 덕분이다. 무제한 문자 메시지가 사실상 공짜이고, 관계의 성격에 따라 그룹으로 분류해 놓고 그에 맞게 동시다발로 같은 인사를 보낼 수 있다. 글과 카드나 사진도 얼마든지 복사하거나 다운받아 붙일 수 있으니까 모범답안 하나만 만들어놓으면 별 수고 안 해도 된다. 근하신년 인사말에 자신이 없으면 인터넷에 정답이 있다. 카톡은 그룹 분류 기능이 없어졌고 동시다발로 문자를 보낼 수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연말연시는 인연을 돌이켜 보게 한다. 신세를 졌으나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바삐 사느라 연락이 소홀했던 지인 친구 친척에게 안부와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다. 감사가 아니더라도 원만한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를 위해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표시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다. 내 폰에는 아직 당신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는 의미다. 밑져야 본전이다.

결혼청첩장이나 부고도 카톡으로 슝하니 날아오는 세태니 굳이 모바일 연하장을 두고 시시비비하려는 건 아니다.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재 티를 내는 것도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적 문제가 있다. 손글씨 연하장을 써 보내고 싶어도 주소를 모른다. 주소를 갖고 있어도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굴비 한 두름도 아닌 연하장 하나 보내겠다고 주소를 물어보기도 좀 그렇다. 그전 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환원하는 작업도 쉽지 않다. 주소는 이제 민감한 개인정보다. 언젠가 기업체 사장을 하는 친구가 청첩장을 보내겠다고 비서를 시켜 집주소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번듯한 동네에 살지 못하는 자격지심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휴대폰 번호 11개 숫자가 내 집주소가 된 세상이니 우편이 아닌 모바일 연하장을 인정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가 유감을 갖는 건, 바로 모바일 연하장의 글이다. 어쩌면 그렇게 천편일률적일까. 그 식상하고 상투적인 문구가 아마 수십 년은 이어졌을 거다.
“올 한 해 보살펴 드린 후의에 감사드리며…다가오는 OO년 새해에는 …하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는 바를 이루고… 행운과 평안이 가득하길…”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감사와 기원이 들어가는 이런 식이다. 그런데 상대가 고마워할 일을 베푼 기억이 없다. 받는 사람은 다 안다. 나에게만 보낸 게 아니고 나만을 위한 기원도 아니라는 것을. 동시다발로 보내야 하니 이런 의례적 문구가 가장 쉬운 방법이겠지. 그나마 맨 앞에 내 이름 석 자라도 써준 사람은 성의가 보여 읽어보게 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못 봤다.
 
나는 그런 식의 모바일 연하장을 보내본 적이 없다. 부모 형제나 가까운 친지에게는 여전히 손편지 연하장을 보낸다. (그런데 우표를 사고 우체통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편의점에서는 왜 우표를 팔지 않을까. 최근에야 인터넷으로 우표를 출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알게 됐거나 신세를 진 사람에게 주소를 모를 때 모바일 연하장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쓴다. 우리의 인연이 어떤 점에서 특별하고 귀한 것인지, 뭐가 고마웠는지, 새해에는 상대가 어떠하기를 기원하는지 길지도 짧지도 않게 표현한다. 사람마다 다른 맞춤형 연하장이다. 이렇게 하려면 품이 꽤 든다. 그래도 이 정도 정성은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그 사람과 나를 생각하며 그만을 위한 글을 ‘쓴다’는 건 사실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받는 이는 그 진심을 느낄 것이다.
 
가까운 일본은 손으로 만들고 쓰는 연하장의 천국이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작년 1월 1일에 배달된 연하장만 16억 통이라는데 1인당 13통을 쓴 셈이다. 가장 많을 때는 40억 장이 배달됐다고 한다. 인터넷 메신저의 발전으로 줄어드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유별난 연하장 문화다. 1월 1일에 도착하도록 연하장 접수 기간이 정해져 있고 연하장에 일련번호를 넣어 경품 추첨을 한다. 스탬프를 직접 만들어 우표에 찍고 가족 사진을 넣어 인쇄하기도 한다.
 
“그동안 여러분과 연하장을 주고받았지만, 올해를 마지막으로 그만두겠습니다.” 일본에서는 임종을 준비하는 슈카쓰(終活)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이런 슈카쓰 연하장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 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하는 연하장은 한 해 약 500만 장 안팎이다. 인구 수의 10분의 1이다. 그것도 대기업들이 주로 사간다. 연하장 배달은 10년 전에 비해서 10분의 1 정도 줄었다고 한다.

연말이 되면 편지함을 기웃거리게 된다. 수취인에 내 이름 석 자가 반듯하게 써있고, 체온과 정성이 느껴지는 손글씨 연하장을 받고 싶다. 그런 관계야말로 평생 인연이다. 모바일 연하장도 나만을 위한 ‘특별한’ 것이라면 환영한다. 저에게 동시다발 연하장은 보내지 말아주시길.

한기봉

◆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를 가르쳤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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