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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부정(父情)에 무슨 진실이 있을까

2018.10.30 김종면 저널리스트/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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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버지들이 수상하다. 의심받을 만한 이상한 짓을 해 공분을 사고 있다. 숙명여고에서는 교사로 있는 아버지가 딸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했다고 해서 난리다. 애먼 학생들이 직접 ‘증거’를 찾아나서는 안쓰러운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지난 26일 국정감사에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이곳 학생이 같은 학교 교수로 있는 아버지 연구실에서 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으로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데 그것이 ‘병역비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카이스트 총장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몰랐다.”며 지도교수 변경과 함께 임직원 행동강령 위반에 대해 감사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당사자 대신 총장이 잘못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동국대에서는 교수인 아버지가 아들이 대학원에 지원할 때는 면접관이었고 학교에 들어온 뒤엔 지도교수를 맡아 최고 학점을 듬뿍 줬다고 한다. 특혜논란이 일고 있지만 당사자는 역시 의혹을 부인한다. 이런 ‘일탈’ 행위가 어찌 이뿐이겠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그동안 우리 주변에서 은밀하게, 아니 공공연하게 이뤄져온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인지 모른다. 

비뚤어진 부정(父情)에도 곡절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를 달아도 공허할 뿐이다. 아무리 가시고기 같은 눈물겨운 사랑이라고 해도 방법이 옳지 않으면 그것은 독이다. 진실을 망각한 거짓된 부정 혹은 부성(父性)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가는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스테판 폴터는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 요소는 아버지라며 이를 ‘파더 팩터(Father Factor)’라고 명명했다. 우리말로 하면 ‘아버지 요인’이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의 태도와 행동, 가치, 직업윤리, 자식과의 관계 유형 같은 것들이 모두 아버지 요인에 속한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만큼 전방위적이고 절대적이다. 

떳떳하고 당당함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자녀교육은 없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자식교육 일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연암에게는 종의·종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큰아들이 성균관 시험에 응시하려 하자 연암은 이런 편지를 썼다. “내가 성균관장과 친밀한 사이임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친밀한 사람이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 못될뿐더러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에게도 누를 끼치는 일이다. 그러니 응시하지 않는 게 좋겠다.” 또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름지기 수양을 잘해 마음이 넓고 뜻이 원대한 사람이 되고 과거공부나 하는 쩨쩨한 선비가 되지 말았으면 한다.”라고 적었다. 과거 시험은 떨어져도 좋으니 들고 나는 것을 잘해서 집안에 먹칠하는 일만 없다면 괜찮다고 한 ‘트인’ 인물이 바로 연암이다. 틈이 날 때마다 이처럼 자식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친 연암은 두 아들에게 더없이 좋은 인생의 스승이었다.

우리 조상은 친구가 주관하는 시험조차 사(私)가 낄지 모른다며 자식에게 응시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떤가. ‘도둑시험’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자식을 제자로 두고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을 슬쩍 올려 ‘연구세습’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어렵다. 적어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직한 삶만은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이기심으로 쌓아 올린 욕망의 바벨탑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잘못이 단 한 점도 없다면 모를까 누가 봐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면 빨리 과오를 인정하고 합당한 처분을 받는 게 아버지 된 자의 도리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라는 직업이다. 멀리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시인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헥토르는 자신의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위해 제우스신과 여러 다른 신들에게 기도를 올린다. “이 아이를 저처럼 강하게 만들어주소서. 그리고 당신들 중 한 명이 어느 날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이 아이를 보고 ‘그는 제 아비보다 훨씬 강하구나’라고 말할 수 있도록 키워주소서”. 우리가 수많은 신화 속 인물 중에서도 특히 헥토르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그가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부성의 관대함과 엄격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감 있는 아버지의 고대적 전형이랄까. 헥토르는 개인의 명예와 부를 위해 전쟁을 치르던 시대에 자식을 위해 전장으로 나갔다. 아내인 안드로마키의 제안대로 성벽을 방패삼아 적과 싸울 수도 있었지만 성 밖 위험한 전쟁터로 내려갔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떳떳한 일이라고 여겼다. 헥토르는 단지 자기 가족만을 위한 편협한 영웅이 아니었다.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조국의 아버지라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부성의 상징 헥토르는 결국 무자비한 영웅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그는 진정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헥토르가 그러했듯 신화 속 아버지도 오늘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자신보다 더 강하고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헥토르가 진정으로 아들에게 건네주려 한 것은 강건한 정신적인 힘이라는 점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는 부성과 관련된 사례들이 대부분 제의나 의식, 신화 등과 관련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의 역할은 본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아버지들은 부성의 상징성을 얼마나 심각하고 무너뜨리고 있는 것인가. 정신의 가치를 외면한 채 세속적 성공에 눈이 멀어 ’편법과 반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문제적 아버지들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사치다. 부성에 대한 자각이 절실하다. 우리는 지금 아버지 역할, 이른바 파더링(fathering)의 위기 시대를 살고 있다. ‘아버지 됨’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다. 아버지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한 희망의 이름이어야 한다. 

김종면

◆ 김종면 저널리스트/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서울신문에서 문화부장, 수석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세계문학 등을 강의했다. 국민권익위원회와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여러 매체에 다양한 성격의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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