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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집’에서 탄생한 명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오스트리아/빈(Wien)

2018.01.05 정태남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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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시가지 한 가운데에는 고딕양식의 슈테판 대성당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있다. 이 대성당을 중심으로 빈 중심가는 길이 약 4km의 널찍하고 우아한 순환도로 링슈트라쎄(Ringstrasse)가 둘러싸고 있다.

링슈트라쎄 주변 궁정정원에 세워진 모차르트 기념상.
링슈트라쎄 주변 궁정정원에 세워진 모차르트 기념상.

빈은 원래 도시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으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널찍한 도로를 1865년에 건설했다.

이 도로변에는 시청, 의사당, 궁전, 궁정극장, 박물관, 오페라극장 등 많은 공공 건축물이 세워졌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숲과 공원이 조성됐다.

링슈트라쎄를 따라 걷다 보면 궁정 정원에 세워진 모차르트 기념상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상보다 더 눈에 띈다.

18세기 중엽 음악계의 두 거장인 바흐와 헨델이 사라지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천재가 바로 모차르트였다.

그는 링슈트라쎄가 건설되기 약 110년 전인 1756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 음악가들은 그들을 하인정도로 취급하는 왕족이나 귀족에게 예속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있던 청년 모차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된 음악가로서 자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는 25살이 되던 해에 제국의 수도 빈으로 이주했다. 그러니까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8년 전이었다.
 
그는 빈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모두 13번 이사 했는데 빈에는 그가 살던 집 중에서 한 곳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피가로 하우스’(Figaro-Haus)라고도 불리는 이 모차르트의 집은 슈테판 대성당 부근의 골목 돔가쎄(Domgasse) 5번지에 있다.

슈테판대성당 가까이에 있는 모차르트하우스.
슈테판대성당 가까이에 있는 모차르트하우스.

모차르트가 부인 콘스탄체와 이 집으로 이주한 것은 1784년 9월 17일.

바로 그해 4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보마르셰의 희곡 <미친 날, 혹은 피가로의 결혼>이 루이 16세의 격렬한 반대 속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고 관객들은 열광했다.

특히 이 작품 중에서 하인 피가로가 주인인 백작을 향해 내뱉는 대사는 충격적이었다.
 
“백작님, 당신은 귀족 신분, 재력, 지위, 영향력 등 이런 것들을 모두 지녔다고 우쭐대지요.

하지만 그처럼 많은 특권을 얻기 위해 당신이 스스로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를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 희곡은 당시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파격적인 작품이었으니 프랑스 시민혁명은 바로 이 작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모차르트는 그해 12월에 프리메이슨에 발을 들여놓았다. 유럽 교양층 인사들 상당수가 가입된 프리메이슨은 18세기 무렵 계몽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었던 초종파적 남성 결사단체로 봉건적 절대주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2년 반 동안 살면서 많은 곡을 썼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다. 사실 보마르셰의 희곡을 빨리 오페라화 하고 싶던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궁정 대본작가 로렌조 다 폰테(1749-1838)와 의기투합해 1786년에 빠른 속도로 이 오페라를 작곡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이 오페라의 공연을 금지했다. 귀족 주인에 대한 하인의 승리를 담은 내용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사회질서를 해칠만 한 첨예한 정치적인 요소는 삭제하겠다는 다 폰테의 설득으로 마침내 그해 5월 1일에 궁정극장에 무대에 올려질 수 있게 되었다.

모차르트하우스 내부. 카드놀이용 탁자와 당구대가 보인다.
모차르트하우스 내부. 카드놀이용 탁자와 당구대가 보인다.

이 명작 오페라가 탄생한 이 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모차르트 관련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 그가 방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실내는 그가 살던 시대 모습대로 어느 정도 재현해 놓았다. 그 중 당구대, 카드놀이 탁자 등은 도박에 빠져있던 그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집은 큰 방이 4개, 작은 방이 2개, 부엌으로 되어 있으니 상당히 넓다. 사실 이 곳은 그가 살던 집 중에서 가장 넓었으며 집세도 가장 비쌌다. 그렇다면 수입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차르트는 돈에 늘 쪼들렸다고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빈에 오자마자 순식간에 유명해져서 작곡가나 피아니스트로서 또 피아노 가정교사로서 남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렸다. 예로 그가 받던 레슨비는 그의 아버지가 받던 레슨비의 10배나 되었고 그의 일 년 수입은 당시 빈의 병원 원장의 수입의 거의 10배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고소득자였던 셈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초판 악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초판 악보.

모차르트는 이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했고 또한 요리사, 하녀도 고용했으며 온갖 사치를 다 부리며 생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프리메이슨 회원에게 걸핏하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도박 빚을 갚기 위해서였을 거다.

당시 도박 빚을 제때 갚지 않으면 불명예로 간주되었고 빚이 너무 많으면 사회적으로 ‘왕따’ 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집을 옮겨 다니며 돈에 쪼들리다가 병이 들어 1791년 12월 5일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생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말이다.

정태남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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