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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속의 섬에서 한라산을 본 적이 있는가

[김준의 섬섬옥수]제주 비양도

2017.11.05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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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내리사랑이다. 자식들이 많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설문대 할망’이 그랬을 것이다.  한라산을 둘러싼 300여 개 작은 오름이 있는 제주도, 그 중 막내 오름이자 작은 섬, 비양도가 애틋하고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찾는 사람도 많고 호시탐탐 넘보는 사람도 많다. 필자도 제주도를 가면 바쁜 일정에도 꼭 비양도를 찾는다.

* 막내의 천년의 꿈, 피어날까
비양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종 13년(1876)이란다. 서씨가 가진 사람이 처음 입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그런데 선사시대 유물이 확인됐다. 그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대나무가 많이 죽도라고 했다고 한다. 등대로 가는 길에 산죽이 많이 자라긴 하지만 문헌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또 해녀들이 필요한 살대(고기잡이 어살그물을 만들 위한 대나무) 를 베기 위해 드나들기도 했고 한다.

30여 가구에 열댓 명 해녀와 30여 척의 어선이 있다. 논은 없고, 고구마 등 약간의 밭농사와 물질과 어선어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섬이 작고 오름도 높지 않으니 늘 식수가 부족했다.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해야 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섬과 바다 밑으로 관을 놓아 공급되고 있다.

한림에서 본 비양도
한림에서 본 비양도

금릉 원담에서 본 비양도
금릉 원담에서 본 비양도

비양도하면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것이 화산폭발이야기이다. <신동국여지승람> 제3권에 기록되어 있다. 간추리면, ‘고려 목종5년(서기 1002년) 6월에 산이 바다 한가운데 솟아나는데 산꼭대기에 4개의 구명이 뚫리어 붉은 물이 솟다가 닷새 만에 그쳤으며 그 물이 엉겨 모두 기왓골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일부에서는 비양도가 지질학으로 보면, 2만7천에서 3만2천년 정도에 이르기에 화산이야기는 비양도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또 같은 책에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 사실을 확인하도록 했고, 그림을 그려 바쳤다’고 했다. 옛날 포구 앞에 ‘비양도 천년기념비’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비양도라는 지명이 한라산에서 봉우리 하나가 날아와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제주도에 100개에서 1개가 모자라 큰 나라가 되지 못했는데 서북쪽에서 한 개 봉이 날아와 떨어지니 그게 비양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주도 본섬 협재, 금능, 옹포 등에서 보는 비양도가 정말 아름답다. 필자 기억에 정말 아름다웠던 비양도 모습은 따로 있다. 한라산에서 본 비양도 모습이다. 영실로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을 진 서쪽 바다에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 비양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하필 그날 그 시간 제주를 끔찍하게도 사랑했던 사람, 김영갑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비양도에 대한 기억이 더 또렷하다.

비양도 천년 기념비
비양도 천년 기념비

* 섬, 가을을 걷다

비양도 도선장은 한림항 물량장 옆에 파출소와 나란히 있다. 시간이 되자 울긋불긋 옷차림을 한 여행객들이 배 앞으로 줄을 선다. 옛날에는 비양도와 한림을 오가는 배는 40여명이 타는 ‘비양호’였다. 지금은 두 배가 넘는 90여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다. 그만큼 비양도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비양도가 갖는 매력은 무엇일까.
비양도에도 어김없이 ‘올레길’이 만들어졌다. 전 구간을 도전하듯 걷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비양도를 찾는 사람들 중에도 있다. 올레길은 물론 진짜 ‘올레’를 찾아 고샅길을 돌고 등대까지 다녀와도 두어 시간이면 족하다. 빨리 돌았다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배를 기다려야 한다.

비양도 올레길은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 둘레길과 비양봉 정상으로 가는 등대길이 있다. 두 길을 모두 돌아도 두어 시간 그러니까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보말죽과 커피까지 마실 만큼 여유롭다. 여행객을 가득 태운 비양호가 앞개선창에 도착하자, 여행객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을 섬을 보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다. 푸른바다, 억새, 돌담, 밭담, 마을, 오름 등 모두 가을로 들고 있다.

비양도 억새
비양도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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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에서 본 한림과 한라산
비양도에서 본 한림(위)과 한라산

* 제주 해녀로 산다는 것

여행객이 내리자 주민들이 오른다. 그런데 어머니들보다 배에 실리는 포대가 더 많다. 터진 곳에 툭 튀어 나온 녀석을 보니 구젱기다.

오늘부터 열리는 ‘한림수산물축제’에 쓸 것이란다. 한림지역 마을어촌계는 모두 부스를 마련해 술과 음식을 준비한다. 이중 비양어촌계는 특별히 준비한 게 있다. 멸치다. 정치망으로 건진 멸치, 주민들은 꽃멸이라고 하는데 ‘샛줄멸’이다. 옛날에는 제주도 곳곳에서 원을 막아 멸치를 잡았다. 제주도가 그렇듯이 비양도 살림과 경제를 책임지는 것은 여자다. 정확하게 말하면 해녀다.

제주도에서도 어장이 좋기로 꼽히는 곳이 협재, 귀덕, 금릉, 한림이다. 그 바다 가운데 비양도가 있으니 비양도 어장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한림항과 산지거점유통센터 역할을 하는 수협이 지척에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다. 문제는 바다다. 예전 같지 않는 바다사정이 문제다. 해방 직후 1946년 12월 20일자 이들 지역을 볼아면서 쓴 동아일보 칼럼 ‘보고제주도시찰기(寶庫濟州島視察記)’에 중 일부다.

(중략) 거센 바람을 헤치고 노도험파를 잠영하는 포변의 해녀작업도 눈에 새로웠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노상을 지나는 인영이 모두 여성뿐인 것이다. 나무를 지고 가는 자도 여자, 우마차를 모는 자도 여자, 물을 지러가는 자도 여자이며 짐 지지 않고 지내는 여자가 없고 복색(옷차림)은 수직(손으로 짠) 면포에 시삽염료(감물염색)로 물들인 활동적인 작업복이었으나 모두가 현대문화를 호흡못한 고색창연한 존재였다.

‘제주에서는 소로 못 태어나 잠녀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제주에서 소는 매우 소중한 가축이다. 밭이 깊지 않고 비탈진 곳이 많아 밭갈이를 하거나 수확한 곡식을 운반할 때 소를 이용했다. 특히 바닷가에 소는 농사일과 갯일과 산일에 운반까지 해야 한다. 그렇게 일이 많은 소보다 더 일이 많다면 옛날 제주 어머니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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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속담에 ‘소로 태어나지 못해 해녀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섬에서 소는 농사일, 바닷일, 산일, 운반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 해녀로 사는 것이 그보다 더 힘들다는 의미다.

* 해녀의 ‘바당’도 가뭄이다

애기 업은 돌을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내리막길에 보행기에 의지해 내려오는 저 노인에 분명 몇 년 전에 이곳에서 만났다. 아내는 물질을 하러 일찍 바다로 나갔고, 뒤따라 느지막하게 아내 바당을 찾아 왔다. 한림항이 보이는 갓바다에서 너 댓 명이 소라와 멍게를 줍고 있었다.

비양도에는 15명 해녀가 있다. 금어기(6-9월)를 제외하고는 일년내내 물질을 한다. 주로 소라를 줍고, 전복을 따고, 가끔 돌문어도 잡는다. 어선어업으로는 봄에는 옥돔, 여름에는 갈치, 가을에는 한치 그리고 겨울과 봄까지 옥돔을 잡는다. 정치망 그물을 이용해 멸치를 잡는 사람도 있다. 해녀들은 금어기에도 바다에 간다. 다만 갯바위에서 청각, 군부(군벗), 성게 등을 채취한다.

노인은 해안에 세워둔 커다란 용암기종에 기대어 바다를 보다 무료했던지 아내이야기를 했다. 한림에서 시집와 평생물질만 하면 살았다. 지금처럼 객선도 없었던 시절에 노를 저어 한림까지 오가는 일이며, 전복 소라와 미역과 톳은 지천이었지만 돈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구젱기가 지천이었던 ‘잠녀의 바당’도 잠수굿에서나 보던 ‘씨드림’을 하고 있다. 무당이니 하는 짓이라 했는데, 실제로 어린 소라와 전복을 뿌려야 한다. 그래서 한림에 많은 해녀들은 일찍부터 사정이 더 낫고 너른 비양도 바다로 배물질을 하러 나왔다. 작은 섬은 늘 자신의 생활터전을 큰 마을에 내주어야 했다. 비양 해녀도 몇 명은 배물질을 하지만 비양도 바당은 오롯이 주민들 바다가 아니다. 이럴 때 공유자원은 힘 있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위한 논리가 되고 만다.

비양도 10 11 잠녀들이 물질하는 바다를 ‘바당’이라고 한다. 마을어업 구역이다. 이곳도 가뭄이 심하다. 매년 어린 소라와 전복을 뿌려야하는 곳이 많다. 그래도 비양도는 나은 편이다. 한림 해녀들이 비양도 앞에까지 와서 물질을 한다.

* 바람과 파도가 쌓은 흔적들

화산폭발 후 용암활동이 만들어낸 다양한 모양의 돌(용암기종)을 보는 것이 제주 섬여행의 매력이다. 비양도에는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는 돌로 ‘가지바위(코끼리바위)’와 ‘애기 업은 돌’이 있다. 다양한 용암기종을 포함해 주변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비양도 북쪽 해안은 용암기종의 모양과 규모다 다른 곳보다 더하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애기업은돌이다.

게다가 이야기도 더했다. 옛날 구좌읍에 살던 해녀는 물질을 하다가 혼자 남게 되었던 모양이었다. 구덕에 있던 아이를 업고 남편이 데리러 와 주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돌이 된 사연이다.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바다에 있는 돌을 옮겨와 해안에 세워 공원을 만들었다.

그냥 바다에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바다와 멋진 자연정원이 될 것인데, 수고스럽게 길가로 옮겨와야 할까. 애기 업은 돌 주변은 과거에 ‘원담’이 있어 멸치를 잡았던 곳이란다. 코끼리바위 주변으로는 구젱기가 제법 있어 물질을 하는 잠녀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암기종 ‘애기 업은 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암기종 ‘애기 업은 돌’

비양도 올레길을 걷고 있는 여행객
비양도 올레길을 걷고 있는 여행객

용암기종 가지바위(코끼리바위)
용암기종 가지바위(코끼리바위)

* 인간이 쌓은 흔적들

자연이 빚은 돌만 아니라 인간이 쌓아놓은 돌도 삶의 흔적이 깃들어 있으면 아름답다. 밭담과 올레와 방사탑이 그들이다. 제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것들이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제주밭담은 청산도 구들장논과 함께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돌담 골목길 올레는 이제 제주 걷는 길의 아이콘이 되어 해외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

밭담이나 올레는 거친 바람을 다스려 섬생활에 이로운 바람으로 바꾸려는 제주사람 지혜가 돋보이는 문화유산이다. 게다가 거칠고 땅심이 얕은 제주에서 밭을 갈고 거름을 얻기 위해서 마소(말과 소)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이들이 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소유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보다 높게 밭담을 쌓았다.

이에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이 방사탑이다. 둘레길을 돌아 펄렁못을 통해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한림항을 바라보며 좌우로 두 개의 방사탑이 있다. 제주에서는 답, 거북, 가마귀, 하르방, 걱대라고도 불린다. 마을 허한 곳으로 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탑이다.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이 있지만 비양도 방사탑은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 방사탑을 쌓을 때도 마을주민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울력을 했다. 집집마다 한 두 명씩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했고, 참석하지 않을 때는 곡식이나 돈을 내야 했다. 돌탑 위에는 까마귀 모양 나무새나 사람 모양 돌을 세워 놓았다. 비양도 방사탑은 최근에 쌓은 듯하다.

방사탑을 지나면 ‘펄렁’이다. 저수지이자 염습지이다. 나무다리를 놓아 다양한 습지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펄렁못이 없었다면 비양리는 적잖은 피해를 보았을 것 같다. 바다와 마을 사이에서 부족한 식수도 잡아주고,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도 잡아준다. 못을 한 바퀴 돌아보고 할망당에 들었다. 섬주민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곳이다. 입구에 협죽도가 꽃을 피웠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할망당에서 풍어제가 열린다. 아침부터 밤까지 제가 진행되며, 마지막은 모형배에 깃발을 꽂고 음식과 돈을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낸다. 재수가 터진 바다를 가서 보낸다.

방사탑
방사탑

제주 텃밭, 우영팟
제주 텃밭, 우영팟

비양도 올레
비양도 올레

* 보말죽으로 허기를 달래다

비양도 등대길은 호젓해서 좋다. 한림항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한라산도 보인다. 수원, 한수, 옹포, 금능, 협재 등 제주도 서해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옛날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등대로 향했다. 이곳도 어김없이 나무로 계단이 만들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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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에서 500m에 불과해 부담스럽지도 않다. 보리수나무가 빨갛게 익고 있었다. 등대를 앞두고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멈췄다. 오른쪽 신창리 풍력발전단지가 괴기스럽다.
수크령이 발길을 붙잡았던 등대로 가는 길은 헐벗고 황폐하게 바뀌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섬을 오가면서 만들어낸 결과다. 주변에 염소배설물도 뒹군다. 녀석들도 한몫 한듯하다.

10여 년 전에는 비양도에 식당이 하나뿐이었다. 할머니는 물질나간 며느리인지 딸인지를 대신해 애기를 보고 있었다. 섬을 둘러보고 출출해 보말죽을 시켰다. 보행기에 아이를 올려두고 주문한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반찬은 배추김치, 부추김치, 깻잎절임 세 가지였다. 지금은 훨씬 세련된 음식이 나오지만 그때 할머니가 만들어준 보말죽 맛보다 덜하다.

그 사이 비양도에도 다양한 먹을거리가 마련되었다. 제주도가 그렇듯이 구쟁기와 보말이 주요 식재료다. 구쟁기는 ‘소라’, 보말은 ‘고둥’의 제주말이다. 구쟁기는 보통 ‘뿔소라’라고 부른다. 구쟁기를 넣은 짬뽕, 짜장이 있고, 보말을 넣어 죽, 칼국수, 떡국, 수제비 등을 만들다. 여기에 옥돔정식도 있다. 할머니집도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원조할머니집으로 바뀌었다. 메뉴도 보말죽 외에 한치, 전복, 소라, 자리 등 각종물회, 갈치, 고등어, 우럭, 쥐치 등 각종 조림까지 메뉴도 다양하다. 그 할머니는 살아 계실까, 아이는 초등학생쯤 되었을 것 같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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