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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있으십니까?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2017.10.27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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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서재.<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고은 시인 서재.<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내가 포털 네이버에서 애독하는 사이트가 하나 있다. ‘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다. 특정 포털을 홍보하고자 하는 건 물론 아니다. 온갖 정보의 바다인 포털에서 이 코너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유익하고 인문학적 품위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조회 수가 적으면 7만에서 많으면 15만~20만이니 나 말고도 좋아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다.   
 
2008년 8월 영화감독 박찬욱을 시작으로 2016년 말까지 8년간 대략 한 달에 한 명꼴로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학자, 작가, 예술인, 명사 등 100명이 집필했다. 이들은 자신의 서재에 대한 이야기부터 독서와 책에 얽힌 소소하거나 특별한 인연, 책에서 얻은 평생의 화두와 통찰과 지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 진솔하게 인터뷰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내 인생의 책’ 5권과 ‘추천하고 싶은 책’ 10권을 소개한다. 올해부터는 각 영역에서 인정받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직업과 관련한 책을 추천하는 시즌2 ‘전문가&책’이 이어지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도끼처럼 그의 영혼을 강타했던 책은 무엇일까. 오늘날 그의 명성을 만들어준 한 권의 책은 무엇일까. 삶이 무의미하거나 고단하거나 힘이 빠지거나 열정이 고갈돼 갈 때마다 서가 구석에서 슬그머니 꺼내서 펼치는 책은 무엇일까.

그들은 심각하고 엄숙하고 격정적이고 현학적으로, 때로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정답게, 무엇보다 성의 있게 자신의 책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지식인의 서재’는 결국 책을 프롤로그로 한 이들의 자서전이다.

서재는 많은 이들의 로망이다. 단어의 어감부터 고급스럽다. 서재는 주인의 비밀스런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책은 사적인 그를 말해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와 지식인, 명사들의 서재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 나는 그런 게 늘 궁금했다.

여기에는 그들이 서재에 편안하게 않아서 마치 독자에게 말하는 것 같은 동영상이 첨부돼 있어 좋다. 동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상과 서가는 어떻게 생겼고, 책은 정갈하게 정리하는지 아무렇게나 쌓아두는지, 책상 위에는 어떤 소품들이 있는지 훔쳐볼 수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2층 높이의 장대한 서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것. 그것은 이들의 ‘인생의 책’이었다. 100인이 꼽은 책은 중복을 빼고 정확히 3686권이었다. 분야별로는 소설이 24%로 가장 많고 다음이 인문도서(18%)였다.

1위와 2위는 어느 정도 짐작할 만했다. 가장 여러 사람이 말한 책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콜레라의 사랑’을 더 좋아하는데, 마르케스는 압도적으로 한국의 지식인이 좋아하는 작가임이 입증됐다. 두 번째는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다. 내 청춘의 가슴도 뛰게 했던 소설이다.

3위는 좀 예상밖이었다. 미셸·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쓴 ‘생각의 탄생’이다. 유일하게 21세기에 나온 책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부터 제인 구달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가장 창조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나를 분석한 책으로 한국에서도 많이 팔렸다.

4위는 미술을 보는 눈을 새로 뜨게 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불후의 명저 ‘서양미술사’다. 전 세계 30개 국 이상에서 번역출간된 스테디셀러다. 5위는 동양고전에 대한 사유를 담은 고 신영복 선생의 ‘강의’였다.

6~10위로는 김수영의 ‘김수영 전집’,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박경리의 ‘토지’ 순이었다. 30위 안에 든 한국 소설은 5권이다. ‘토지’와 ‘관촌수필’(이문구), ‘광장/구운몽’(최인훈),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칼의 노래’(김훈)였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나 셰익스피어, 헤밍웨이의 소설이 30위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게 조금은 의외였다.

이들은 “나에게 서재란 (  )이다”라는 비유로 글을 시작했다. 인상적인 몇 개를 요약해 소개한다.

▶일요일의 공동묘지(물리학자 정재승) “책 한 권 한 권은 몇 백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서 쓴 것이다. 나는 공동묘지 관리자의 마음으로 무덤 하나하나를 챙기면서 옛날 사람들의 삶을 뒤적여본다.”

▶전화부스(소설가 한강) “공중전화 부스에서는 바깥세계가 보이지만 소리는 차단된다. 수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며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는 그런 공간이다. 서재는 대부분 죽은 사람들 또는 지금 옆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다.”

▶먼 나라의 공항(소설가 은희경)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내가 의식하는 건 나 자신뿐이다. 서재는 그렇게 폐쇄된 공간이면서도 열려있다. 나는 볼 수 있고 밖에서는 나를 볼 수 없는 유리방 같다.”

▶잠수함(소설가 김영하) “나를 태워서 물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한다. 그곳은 수면 바깥에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다.”

▶봉쇄수도원(시인 장석주) “서재는 자발적으로 봉쇄된 수도원에 들어와서 수도하는 수도자라는 느낌을 준다. 자아를 성숙시키고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감옥(문학평론가 황현산) “그렇게 행복한 곳은 아니다. 늘 안에 갇혀 살아야 하고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야 하고, 또 늘 노역을 해야 하는 곳이다. 항상 의무가 있고 나를 가둬두어야 하는 곳이다.”

▶제2의 자궁(기생충학자, 저술가 서민)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나를 두 번째로 태어나게 한 곳이니까.”

이들이 정의한 서재란 결국은 물리적으로는 오롯이 격리된 나만의 성소이면서도, 머리와 가슴으로는 외부세계와 몇 백 년 전의 인물과 대화하고 호흡하는 타임머신의 운전석이다.

얼마 전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국민이 추천한 책 580권으로 꾸민 ‘대통령의 서재’를 공개했다. 많은 민초들의 ‘내 인생의 책’이 추천됐을 것이다. 책을 즐겨읽기로 소문난 문 대통령이 임기 동안 다 읽어보면 좋겠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하면서 “백악관 생활에서 나를 생존하게 한 힘은 바로 독서에 있었다. 매일 잠들기 전 한 시간씩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재임 8년 동안 역사에 대한 안목과 판단에 균형감을 준 건 세익스피어의 고전이었다고 고백했다.

오늘 서재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나의 책꽂이를 둘러보며 생각해 본다. 내 인생의 책을 하나 꺼내라면 난 어떤 책에 손이 갈까. 글쎄다. 가장 자주 들춰본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책 전체에 차고 넘치는 동화 같은 아포리즘이 늘 좋아서다.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찾아야 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건 껍데기뿐이야.”라는 구절에 여러 번 밑줄을 그은 흔적이 남아있다. ‘지식인의 서재’에서는 16번째로 많이 추천됐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에 미쳤다.

“서재는 꼭 물리적 공간이어야 할까.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했듯이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 책읽기가 싫어서 서재가 없는 게 아니잖아, 방이 없어서 책 살 돈이 없어서 서재가 없을 수 있잖아, 서재가 꼭 집안에 있어야 하는 법도 아니잖아, 전철 안도 카페도 동네 도서관도 그리고 내 마음 구석도 다 서재가 아닌가, ‘나만의 서재’는 없어도 ‘내 인생의 책’ 한 권이 있으면 그게 최고의 서재지, 설사 책이 아니면 어때, 내 인생의 시 한 수도 좋고 그림 한 편도 좋지, 그게 내 인생의 고갱이가 되어준다면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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