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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질주 속 길 잃은 ‘방송예능’

김종면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2017.08.31 김종면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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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판타지나 공포소설, SF, 추리소설 같은 장르문학을 하대했다간 대번에 시대에 뒤진 ‘비교양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고급문화와 순수문학을 신봉하던 모더니즘 시대만 해도 장르문학은 하위 장르로 폄하되고 무시당했다. 장르소설은 값싼 누런 갱지에 인쇄돼 ‘펄프 픽션’이라 불리며 싸구려 통속소설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장르문학은 본격문학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의 총아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는 물론 장르문학이 그 특유의 문법을 통해 본격문학 못지않은 고도의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문화 우세종’으로 ‘장르’의 힘은 곳곳에서 발휘되고 있다. 방송가에서는 한때 장르 드라마가 맹위를 떨쳤다. 의학 드라마가 그 두드러진 예다. 1991년 MBC에서 방송돼 인기를 모은 ’동의보감’을 비롯해 ‘종합병원’ ‘하얀 거탑’ ‘허준’ ‘외과의사 봉달희’ ‘낭만닥터 김사부’ 등 의학 관련 드라마들은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왜 장르 드라마인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청자들은 뻔한 ‘멜로 라인’의 사랑 드라마에 염증을 느꼈다. 스타시스템에 의존한 트렌디 드라마 역시 더 이상 새로움을 주지 못했다. 이런 기류 속에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장르 드라마다. 소재의 한계로 인한 차별화의 필요성이 높아지며 장르 드라마 제작 붐이 일어난 것이다.

장르 드라마는 지금은 다소 주춤한 상태다. 당초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극적 긴장감을 살린 의학 드라마는 인간의 본능과 의사라는 직업 세계의 실상을 다룬 고유 장르로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MBC가 새로 선보인 메디컬 드라마 ‘병원선’은 어떤 평을 받을까.

장르 드라마가 제 몫을 해온 데 비하면 이른바 ‘예능’이라는 이름의 장르물은 본격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삼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시청자들에게 산뜻하게 다가가기는커녕 거부감만 안겨주는 ‘그들만의 프로그램’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예능 프로그램은 그동안 꾸준히 가지를 쳐왔다. ‘먹방’, ‘쿡방’을 시작으로 시사예능, 관찰예능, 육아예능, 마침내 말 많은 가족예능으로까지 ‘진화 아닌 진화’를 거듭했다. 예능 프로그램들은 내용과 형식은 각각 다르지만 오락적인 요소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은 같다. 예능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제대로 된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바쁜 일상 속 현대인의 삶에 쉼표를 선사하는 건강한 웃음과 여유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힐링’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에는 방송가에 넘쳐나는 가족예능 프로그램들이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논란의 핵심은 유명 연예인의 자식 혹은 부인이라는 이유로 예능 프로그램에 ‘무임승차’ 한다는 것이다. 아들, 손자, 며느리 할 것 없이 다 나와 ‘가족 쇼’를 벌인다. 예능 프로그램이 마치 연예인 세습의 플랫폼 구실을 하는 셈이니 시청자들이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가족이 함께 출연해 얘기를 나눔으로써 연예인의 숨겨진 사생활 등 진솔한 내면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쏟아내는 게 서푼짜리 신변잡사나 세상 이치와 동떨어진 흰소리, 카메라 앞에서 연출된 눈물 등이 고작이라면 예능 프로그램의 의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예능 프로그램은 연예인 가족 놀이터도 가족 사업장도 아니다. 트로트계를 대표하는 한 가수는 지난 시절 뒷문이 없는 ‘업소’와는 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팬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란다. 대중의 이미지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라면 적어도 그런 정도의 진중한 자의식과 순수를 가꿔갈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가족예능은 소재로 볼 때 충분히 공감을 얻을 만한 장르이지만 그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출연자들의 속 깊은 내면을 끌어내야 하는 만큼 늘 진정성 시비가 따랐다. 악마의 편집도 문제가 됐다. 그러나 최근 가족예능을 통한 ‘연예 대물림’ 만큼 시청자들의 분노를 산 적은 없었다. 연예인 지망생들은 공개 오디션 한번 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면 ‘연예인 프리미엄’은 용인의 수준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예능 프로그램이 노골적인 ‘핏줄 마케팅’의 장이 되고 예비 연예인 인증 무대가 되는 현실은 차라리 사회악에 속한다.

예능 프로그램에 그토록 집착하는 심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본능인가. 요즘은 정치인들도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기 위해 목을 맨다. 아예 고정으로 출연하는 이들도 있다. 나름대로 정치 손익계산서를 작성한 후의 행동이겠지만, 진정 의식 있는 정치인이라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알리는 일보다는 국민을 위한 일에 1분1초라도 더 시간을 쓰려 노력하지 않을까. 정치인들이 분별없이 예능에 출연해 ‘연예인놀이’를 하며 정치를 희화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 냉소와 정치 허무주의를 부추길 뿐이다.

예능이 ‘권력’이 되어버린 시대이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다.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들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한 것인가. 연예인은 물론 그 가족이라도 그냥 갖다 쓰면 최소한의 시청률을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다. 이제라도 ‘예능의 정의(正義)’를 바로 세워야 한다. 예능 제작자에게도 연예인에게도 지금 필요한 것은 보다 창의적인 정신과 공적인 사고다.

김종면

◆ 김종면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서울신문에서 문화부장 등을 거쳐 수석논설위원을 했다. 지금은 국민권익위원회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세계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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