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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는 누구일까?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피카소 VS 뒤샹

2014.10.28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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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20세기 최고의 영향력 있는 작가하면 주저 없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두 사람은 ‘뒤샹 대 서양미술’, ‘피카소 대 서양미술’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해도 될 만큼 미술사에 끼친 영향이 장대하다.

실제 지난 2004년 12월 1일, 영국의 미술가 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20세기 100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무엇인가?’란 설문조사에서 뒤샹의 <샘>(1917)과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예술가로서 행보가 지극히 대조적이었던 두 사람의 예술과 그 가치는 여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만약에 두 사람 중 미술사에 한 사람만 기록되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피카소일까? 작가들의 정신적 우상인 뒤샹일까?

◇ 타고난 천재 VS 혁명가

피카소는 미술 역사상 가장 성공한 화가로 손꼽힌다. 프랑스 남부 저택을 정물화 한 점으로 살만큼 그림값이 비쌌고, 세계인이 자국의 수상보다 피카소의 이름에 더 익숙할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다. 동시대 그의 유명세에 버금가는 인물을 들자면 찰리 채플린 정도였다.

10대에 이미 천재적 소질을 보여 화가(미술교사)였던 아버지가 붓을 꺾었다는 일화는 그의 신화적 삶을 서술하는 시작점에 불과하다.

피카소, 첫 성찬식. 1895~96, 캔버스에 유채
피카소, <첫 성찬식>. 1895~96, 캔버스에 유채

피카소는 예술적 성취, 부와 명예는 물론 건강한 육체와 장수, 숱한 여인들과의 사랑까지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성공으로 가득한 삶이었기에 살아생전 그의 예술과 생활은 언제나 대중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피카소가 파리에 정착한 것은 1904년(23세)이었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5만여 점에 이른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80평생 작업했다고 해도 하루에 평균 2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한 셈이다. 일평생을 창작의 열정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할만하다.

뒤샹의 삶은 피카소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부와 명예로 성공한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의 예술적 감각은 할아버지, 어머니(뒤샹은 부정함)로부터 물려받았다. 두 형과 여동생까지 법률가와 의사라는 촉망받는 직업대신 예술가의 길을 선택할 만큼 유전적으로 예술 감각이 뛰어났다.

뒤샹이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17세였다. 피카소가 파리에 정착한 해와 같은 1904년이다.

그는 피카소처럼 사실적 표현력에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에콜 데 보자르 입학에 실패한 후 작가로서 주목받기까지 ‘살롱도톤(매년 가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 전람회)에 실험적 작품을 출품했다.

눈여겨볼 것은 피카소가 20대 후반부터 돈 걱정에서 벗어나 입체파의 리더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뒤샹 역시 입체파의 조형성을 뛰어넘는 혁명적 기질로 이미 독자적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아비뇽의 처녀들 VS 샘

피카소가 성취한 공로 중 20세기 미술계의 중요한 혁신으로 일컫는 입체파의 창안을 빼놓을 수 없다. 1907년 발표한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500년 동안 지속해온 서구미술의 전통을 무너뜨린 문제작이자 새로운 유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해부학적 오류, 원근법 무시, 시점의 불일치 등 르네상스 이후 내려온 회화사를 뒤흔들어 놓았다.

성(性)적 표현(창부의 표현을 보편화시킴), 배경의 분할적 표현(주제 자체와 동일 표현), 다각적 시점, 원시주의 등 <아비뇽의 아가씨들>작품에 나타난 특징은 당시 모든 큐비스트에게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는 그를 미술사에 남게 한 일등공신이다.

뒤샹이 살아 생전 제작한 작품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피카소의 작품 수에 비교하면 0.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발표한 작품마다 문제작으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며, 작가들에게 끼친 파급력은 피카소를 압도한다. 1917년 뉴욕의 한 전시회에 출품한 <샘>이 대표적이다.

뒤샹, 샘(Fontaine).1917
뒤샹, 샘(Fontaine).1917

1912년 발표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가 입체파 화가들과 갈등을 일으켰다면 <샘>은 미술계 전체를 뒤집어 놓았다. 일상용품인 변기가 하루아침에 예술품으로 둔갑해서 미술관에 놓였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끝없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뒤샹의 승리로 끝났다. <샘>이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인정되면서 현대미술의 모든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오브제(작가에 의해 선택되어 의미가 더해진 물체)가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작품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샘>은 탈 화폭의 미술(회화중심)시대를 열었고, 회화와 조각의 장르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으며, 원본과 복제본의 구분을 파괴했다. 손의 예술을 거부하고 개념을 중요하게 만들었다.

회화의 지위를 무너뜨리고,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설치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이끌었다.

오늘날 <샘>은 <모나리자>만큼 유명해졌고, 많은 작가에게 차용, 패러디, 패스티시 등 모방대상이 되어 또 다른 창작활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 대중적 인기 VS 정신적 지주

피카소의 모든 삶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의 저자 존 버거가 ‘피카소는 천재적 재능을 너무 일찍부터 발휘한 나머지 정작 원숙기의 나이에 이르러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했다.’고 한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 1945년 64세 이후 1951년에 제작한 <게르니카>를 제외하면 미술사에 남을 만한 개혁적인 작품을 찾기 힘들다. 더는 그릴 것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65세 이후 작품들이 양식상의 유희나 욕정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많은 이유다. 9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창조적 변화를 추구했던 피카소의 성공신화는 명성이 쌓일수록 그 내면은 공허했다고 할 수 있다.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이에 비해 뒤샹은 반대였다.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비난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정작 작가들에게는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프란시스 피카비아, 제프 쿤스, 데미언 허스트 등 현대미술의 블루칩 작가들이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은 뒤샹의 예술이 기원이라고 고백하고, 음악가 존 케이지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하나의 뒤샹 모습이다”라고 한 것은 뒤샹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대변한다.

미술경매시장 최고의 인기작가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피카소와 생계를 위해 작품을 판매하는 것을 혐오했던 뒤샹의 작가정신은 미술사에서 가장 대비되는 예술가의 모습이다.

각자가 추구한 삶의 태도는 달랐지만, 두 사람이 예술작품을 통해서 일깨워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 점’은 서로 닮았다. 피카소가 없는 세계미술시장은 공허하고, 뒤샹이 없는 현대미학은 무의미하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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