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피플

국가 R&D의 우선 순위

황창규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

 
오래전부터 별렀던 일을 큰맘 먹고 실천하는 게 있다. ‘유학(儒學)대학원’ 학생이 됐다. 일주일 두 번, 일과 후 세 시간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쉽진 않지만 워낙 하고 싶었던 공부라 즐겁다.

평생을 첨단기술과 함께한 내 이미지 때문인지 고전(古典)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궁중 화가였던 할아버지께 장구를 배우면서 유년기부터 싹튼 DNA, 또 힘든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고전을 뒤적이며 옛 성인들 혜안을 훔쳐보곤 하는 내 습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요즘 배우는 것 중에 ‘세상사엔 본(本)과 말(末), 종(終)과 시(始)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깝다’는 대학(大學) 경구(警句)는 씹을수록 새롭다.

2001년 플래시메모리 사업화를 막 시작했을 때다. 당시 휴대폰의 아이콘이었던 노키아는 노어플래시의 압도적 1등인 인텔이 가격을 올리려 하자 내게 노어 공급을 요청해 왔다. 지금이야 대용량 저장이 가능한 낸드플래시가 대세지만, 부팅 속도가 더 중요했던 그때는 노어플래시가 시장을 지배했다. 2~3년 후 낸드가 곧 뜰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지는 노어를 먼저 공략하는 부담, 인텔에 공급하는 물량을 차질 없이 대체해야 하는 부담을 무릅쓰고 공급을 결정했다. 미래 플래시 시장 선점을 위해 노어를 소위 ‘레버리지’로 활용하자는 복안이었다. 그때 낸드가 뜨길 기다렸다 이를 뒤늦게 공략하려 했다면 플래시 메모리가 '대한민국발 글로벌 표준'이 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국가 R&D를 책임지면서 이 경구가 또 떠올랐다. 기초 기술이 약한 우리가 이 분야 투자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는 일견 타당하다. 실제로 5년 전만 해도 상용화 R&D 비중에서 뒤졌던 기초 R&D가 슬금슬금 증가하더니 작년엔 결국 역전됐다. 기초연구를 강화하자는 데 토를 달 이유는 없지만, 이 현상이 나라 전체 경쟁력에 미칠 영향은 좀 더 따져봐야 한다.

선진국을 보자. 스웨덴 국내총생산(GDP) 대비 R&D는 3.6%로 세계 최고 수준이나 볼보 에릭슨 등 대표 기업들 경쟁력은 급전직하했다. 트랜지스터를 최초로 개발하고 노벨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한 미국 벨연구소 역시 명성이나 규모가 예전 같지 않다. 기초연구에 집착했던 옛 소련도 비슷한 결과에 시달린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 기업은 이윤 추구라는 속성상 연구(R)와 개발(D) 중 ‘D’에 집중하므로 기업 혼자서는 신시장 선점 리스크 테이킹이 버겁다. 정부가 동참해야 하는데, 국가의 상용화 R&D 비중이 계속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둘째, 기초연구 결과가 자연스럽게 기업에 스며들어 상용화로 바로 연결되면 좋으련만 시장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한 채 사장되는 기술이 부지기수다. 둘 다 중요하나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는 사고(思考)가 더 긴요하다. 핵심 특허 없는 상용화 기술, 시장에 내놓기가 곤란한 기초기술 모두 사상누각이다.

요즘엔 산업 발전이 관련 기초 학문 발전을 유도한다. 비행기는 물론 기초연구의 산물이지만, 상용화 이후에야 비로소 항공 유체역학, 열역학 등 기초 학문의 토대가 마련되었음에 주목하자.

21세기 ‘시장의 시대’는 ‘말’末)'이 ‘본(本)’을 이끌고 ‘종(終)’이 ‘시(始)’를 싹트게 한다. 기초기술 중시론과 상용화 실용론을 연결하는, 그리고 결과를 겨냥한 목적 연구가 중요한 이유다.

기술의 원천성만을 확인하는 랩(Lab) 스케일 투자와 신시장에서 잭팟을 해야 하는 필드(Field) 스케일 투자 중 어디에 더 많은 재원이 투입돼야 할지에 대한 판단은 중대하다. 국가 R&D 투자는 시장 논리와 국가 전체 경쟁력 관점에서 배분돼야 한다는 게 기업 20여 년, 그리고 공직 3년을 복무한 내 생각이다. 의도했던 건 아니나, 현장을 먼저 경험하고 나서 국가 R&D를 다루게 된 내 커리어 패스(Career Path)가 이를 지시(指示)한다.

2012.05.08 황창규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