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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힙합과 코미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들 ◆ 하우하이(How High, 2001) 하우하이 포스터(사진=기고자 제공) 하우하이는 2001년에 개봉한 힙합 코미디 영화다. 미리 노파심에 일러두지만 이 영화에 탄탄한 서사나 설득력 있는 개연성, 깨달음을 주는 교훈 같은 건 기대하지 말길 바란다. 대신에 이 영화에는 어이없는 설정과 뜬금없는 전개, 지저분한 유머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종일관 유쾌하고 엉뚱하니, 이런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열광할만한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메쏘드맨과 레드맨이라는 두 래퍼의 매력과 캐릭터에 기대는 작품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돈독한 우정을 이어오며 듀오 앨범도 내는 등 미국힙합 씬 최고의 다이나믹듀오인 이들은 스크린 안에서도 거칠 것 없는 악동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 바버샵: 더 넥스트 컷(Barbershop: The Next Cut, 2016) 아이스큐브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바버샵의 4번째 시리즈다. 3대째 운영하는 미국 시카고의 한 이발소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다. 흑인 동네에서 이발소는 주민이 모여 정치, 사회, 문화와 스포츠를 토론할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이다. 이러한 켈빈(아이스큐브 역)의 이발소에는 이제 여성 고객을 위한 미용실 공간도 생기면서 식구가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지속되는 동네의 폭력과 범죄는 이발소에 충격을 안겼고, 마침내 이들은 평화를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힙합아티스트 커먼, 니키미나즈, 이브 등이 출연했다. ◆ 프라이데이(Friday, 1995) 프라이데이는 1995년에 개봉한 힙합 코미디 영화다. 아마 힙합 영화 안에서 코미디 장르로 한정하자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힙합 코미디 영화의 아이콘 같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프라이데이의 감독은 F. 게리그레이가 맡았다. 원래 F. 게리그레이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거둠에 따라 그 후로 굵직한 흑인/힙합 영화의 감독을 계속 맡게 된다. 주연인 아이스큐브와 크리스터커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스큐브는 N.W.A의 멤버로서, 래퍼로서 이름을 알렸지만 영화계와도 깊고 긴 인연을 가지고 있다. 프라이데이 같은 힙합 코미디 영화에 다수 출연했으며, 보이즈앤후드 같은 진지하고 무거운 흑인영화에서도 역시 주연을 맡았다. 바버샵: 더 넥스트 컷(왼쪽)과 프라이데이 포스터(사진=기고자 제공) 크리스터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흑인 코미디언 중 한 명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살아가는 한가하고 유쾌한 흑인 청년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요즘은 케빈하트가 흑인 코미디언의 아이콘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크리스터커가 있었다. 프라이데이의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라면, 이 영화가 그 후 인터넷 밈과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실제로 두 주인공의 익살스런 대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 같은 존재가 되어 수많은 패러디와 오마쥬를 양산했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역학관계는 그 후 등장하는 비슷한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티셔츠와 각종 굿즈가 양산되었음은 물론이다. ◆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힙합에 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음악과 예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고, 최근에는 제이팝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힙합 에볼루션, 힙합의 시학 등이 있다. murdamuzik@naver.com 2024.05.31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
- 기네스북이 인정한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가상 밴드 가상 밴드(Virtual Band) 혹은 가상 음악가라는 것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나름 오래된 작업 방식이다. 만화영화 속 노래 부르는 등장인물을 시작으로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가상 뮤지션들의 형태는 보다 정교하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갔다. 캐릭터 혹은 가상 아바타로 구성된 가상 밴드는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앨범의 아트웍과 비디오 클립, 심지어는 무대 위까지, 시각적 요소를 다루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노래의 창조자이자 연주자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팬들 또한 실제 존재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을 추종한다. 가상 밴드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80년대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노래 부르는 다람쥐들인 앨빈과 슈퍼 밴드(칩멍크)가 있고,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린 민메이가 있었다. 이후에는 가상 아이돌 보컬로이드 가수 하츠네 미쿠, 그리고 한국의 대표 사이버 가수 아담의 사례가 있기도 하다. 가상 밴드라는 용어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릴라즈를 통해 대중화됐다. 고릴라즈는 보컬 건반의 2-D, 베이스의 머독 니칼스, 기타 및 보컬의 누들, 그리고 드럼의 러셀 홉스의 4인조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만화 캐릭터이며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음반들을 발표하면서 단순히 가상 밴드로써의 특이함을 넘어서는 팬덤을 구축해내며 주요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를 서기도 했다. 이 가상의 세계 뒤에는 실제 아티스트들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고릴라즈라는 프로젝트는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됐다. 브릿팝 밴드 블러의 보컬 데이먼 알반, 그리고 탱크걸의 원작자인 만화가 제이미 휴렛이 그 주인공이다. 이 둘은 런던의 같은 아파트에서 거주하다가 우연히 MTV를 보고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제이미 휴렛은 탱크걸에서부터 유지되던 삐딱하고 어두운, 하지만 유머러스한 캐릭터들을 완성했고 데이먼 알반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과 자마이카를 오가며 녹음을 이어갔다. 고릴라즈(이미지=공식 홈페이지 https://www.gorillaz.com) 데이먼 알반은 블러에서 하지 않았던 것들을 고릴라즈를 통해 마음껏 시도했다. 블러 시절의 브릿팝은 물론 힙합, 전자음악, 그리고 덥과 라틴, 펑크와 월드뮤직을 포함한 다양한 스타일을 탐구해갔다. 그리고 그렇게 발매된 2001년도 데뷔 앨범 Gorillaz는 싱글 Clint Eastwood의 성공으로 인해 유럽 등지에서 플래티넘을 달성했다. 이 데뷔 앨범의 경우 힙합 프로듀서 댄 디 오토메이터가 개입하고 있었는데 그는 비슷한 시기 델트론 3030이라는 서기 3030년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컨셉 앨범을 만들면서 데이먼 알반을 피쳐링시켰던 적이 있었다. 데이먼 알반 또한 댄 디 오토메이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델트론 3030에서 작업했던 델 다 훵키 호모사피엔과 DJ 키드 코알라를 고릴라즈의 프로젝트로 합류시켜낸다. 고릴라즈의 데뷔 앨범에는 그 밖에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 토킹 헤즈와 톰톰 클럽의 티나 웨이모스, 그리고 가상 캐릭터 누들과 이미지가 겹치는 시보 마토의 미호 핫토리 등이 함께했다. 이처럼 다양한 게스트진을 포괄해내는 형식은 이후에도 고릴라즈라는 프로젝트의 어떤 특징처럼 굳어진다. 고릴라즈의 데뷔 앨범 투어 당시에는 공연에서 애니메이션 밴드 멤버들이 거대한 스크린으로 전면에 등장하고 실제 곡을 연주하는 밴드는 그 뒤에 위치하면서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로 공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멘트를 할 때는 성우들이 마치 더빙하듯 청중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데이먼 알반은 이후 인터뷰에서 스크린 뒤에서 연주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고 이상한 경험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고릴라즈의 두 번째 정규 앨범 Demon Days의 경우 미국 시장에서까지 성공하면서 비교적 드문 포맷인 가상 밴드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 제이지의 리믹스 앨범으로 한창 이목을 집중시켰던 프로듀서 데인저 마우스가 이전 작에서의 댄 디 오토메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보다 팝적인 감각을 장착하게 됐다. 브레익 비트와 소울, 라틴의 요소들을 적절히 분배해 나가는 와중 특히 드 라 소울이 피쳐링한 곡 Feel Good Inc.가 빌보드 얼터너티브 송 차트 8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아이팟 광고에 삽입되면서 앨범의 성공을 견인한다. 그리고 Demon Days의 투어때부터는 캐릭터 뒤에서 공연했던 데이먼 알반을 비롯한 실제 밴드 멤버들이 무대 앞으로 나온다. 특히 따로 영상으로도 공개됐던 Demon Days 투어의 맨체스터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공연에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무대 위로 올려내면서 풍성한 음향을 구현해냈다. 화면의 캐릭터의 입과 밴드가 싱크하는 것이 다소 복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무리 없이 공연이 진행됐고 고릴라즈의 공연은 청각적으로는 물론 시각적으로도 항상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있었다. 환경 보호를 테마로 한 세 번째 앨범 Plastic Beach의 경우 신스팝의 요소들과 크라우트 록 풍의 전개들이 보다 급진적인 인상을 줬으며, Plastic Beach의 투어 당시 도로에서 녹음된 앨범 The Fall 또한 같은 해 말에 발매했다. 2015년에는 10년 넘게 캐릭터 러셀 홉스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레미 카바카 주니어가 밴드의 영구적인 멤버로 자리매김했다. 7년 만에 발표한 앨범 Humanz에서도 빈스 스테이플스, 그레이스 존스, 대니 브라운 등을 피쳐링 시키고 노엘 갤러거를 작곡에 참여시켰으며, 이듬해 발표한 The Now Now의 경우 참여진을 대폭 줄이면서 데이먼 알반 중심으로 작업됐다. 앨범 커버에도 데이먼 알반의 캐릭터라 볼 수 있는 2-D 혼자 기타를 연주하는 형태로 구성해 놓기도 했다. 참고로 고릴라즈는 2017년 무렵 페스티벌을 통해 국내에 내한 공연을 다녀갔다. 작년에도 썬더캣 스티비 닉스, 배드 버니 등의 쟁쟁한 참여진을 앞세운 Cracker Island를 발표하면서 고릴라즈는 여전히 롱런 중이다. 고릴라즈가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고릴라즈의 영화화 계획이 잠시 계획되기도 했지만 결국 데이먼 알반과 제이미 휴렛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면서 무산시켜버렸다. 이들이 캐릭터 뒤에 서서 전면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만큼 이들이 어디까지 노출하고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느냐가 가상 밴드로서 꽤나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사실 가상 밴드라는 시스템 자체가 어찌 보면 프로듀서 아래 기획되어 일종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듯 보이는 작금의 아이돌 산업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고릴라즈의 경우 앞에서는 제이미 휴렛이 비주얼 적인 부분들을 다뤄내는 동안 뒤에서는 데이먼 알반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는 한편 상상력을 키워 나가면서 폭넓은 방식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다채로운 사운드와 광범위한 아티스트들과의 공동 작업이 이뤄지게 됐다. 생각해보면 의외로 고릴라즈가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블러와 비교하는 식의 반응은 거의 없었고 데이먼 알반의 솔로 프로젝트라는 이미지 또한 없었는데 돌아보면 이것이 오히려 이득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데이먼 알반의 정체를 가리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배경이나 편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음악을 감상하게끔 유도해 내는 역할을 했다. 다양한 음악들이 장난스럽게 섞여 있었고 데이먼 알반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도 블러 때와는 또 다르게 의욕으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참고로 고릴라즈 데뷔 이후 블러는 앨범 한 장을 더 내놓고 휴지기에 들어갔고 블러의 또 다른 멤버 그레이엄 콕슨 또한 인디와 포크 풍의 앨범들을 꾸준히 발매해갔다. 이후에는 블러가 다시 뭉치면서 데이먼 알반은 고릴라즈, 블러, 심지어는 자신 명의의 솔로 앨범 활동까지 병행해내며 복잡한 일정을 전개해 나간다. 음악 비즈니스에서 가상의 캐릭터로 운영되는 세계관으로 고릴라즈 정도까지 와본 프로젝트는 아직 없을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내용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곡이든 놀라운 그루브를 장착하고 있는 이들의 음악에는 쾌활함과 어둠을 겸비한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고릴라즈의 첫 앨범은 새로운 21세기가 막 도래했을 당시 출시됐는데, 당시에는 정말로 21세기에는 이런 새로운 컨셉들이 더 많이 쏟아지겠거니 하는 순진한 기대감 같은 것이 증폭되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과장해보면 정말로 새로운 천년이 열리고 있는 중이라는 착각을 고릴라즈의 출현을 통해 체감했다. ☞ 추천 음반 ◆ Gorillaz (2001 / Parlophone, Virgin) 고릴라즈가 공연할 때 가장 큰 호응을 얻어내는 레퍼토리인 Clint Eastwood, 각종 CM에 활용되면서 인기를 끌었던 19-2000, 익숙한 트럼펫 샘플링의 Rock the House, 낮은 브레익비트와 키드 코알라의 스크래치가 불을 뿜는 Sound Check(Gravity) 등 앨범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이미 친숙하다. 가상 밴드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위대한 첫 발자국으로 2021년에는 앨범 발매 20주년 기념 박스세트 또한 발매됐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2024.05.30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이 나라 중장년은 청춘의 어느 한 지점을 그에게 빚지고 있다. 사람만 빚을 졌을까. 우리의 현대사도 채무자다. 세상을 바꾼 노래는 흔치 않다. 그 노래를 만들었거나 부른 이가 의도했든, 안 했든 말이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던 노래가 세상을 바꾸었다면 그건 이미 주인의 손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그의 노래가 아닌 것이다. 부르는 이의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노래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해 왔다. 바로 이 노래다. 애국가 빼면 온 겨레가 아는 유일한 노래라는 말까지 듣는 노래. 어떤 이는 명예 애국가니, 청춘의 애국가니 했다. 나는 이제 젊지 않지만 가슴 속에서는 영원히 늙지 않는 노래, 아침이슬을 듣는다. 올곧게 뻗어가는 양희은 버전을 먼저 듣는다.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주는 고품질 헤드폰으로 들어야 한다. 눈을 감는다. 흘러간 청춘, 그 어느 장소에 나는 돌아가 있다. 청후감(聽後感)을 말하고 싶은데 마땅한 한마디가 주저된다. 장엄? 비장? 치열? 처절? 처연? 결연? 숙연? 경건? 숭엄(崇嚴)이란 단어가 있다. 국어사전에는 높고 고상하며 범할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한 느낌이라고 했다. 이 노래는 성가(聖歌)다. 젊음의 성가요, 삶의 성가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1971년, 작사·작곡·노래 김민기) 후대가 전설이라 칭한 뮤지션은 우리 가요사에 더러 있다. 전설은 특히나 요절한 이에 대한 헌정에 어울리는 칭호다. 김광석, 김현식, 유재하, 김정호 정도일까. 그러나 살아서 전설로 불린 사람은 거의 없다. 죽어서 전설이 된 이를 만든 살아있는 전설. 그러나 그 전설은 오랫동안 뒷것이었다. 나는 뒷것이고 너희들은 앞것이야. 나를 자꾸 앞으로 불러내지 말라 했던 그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앞것이 되길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그다. 스스로 뒷것이라 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쟁쟁한 앞것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암울했던 시대 얼굴 없는 앞것이었다. 아니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영원한 앞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있던 사이에 어언 73세가 된, 이젠 시대가 아니라 암세포와 싸우고 있는 김민기가 살아있는 전설로 소환됐다. SBS스페셜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5월 5일 종영했다. 20대 초반부터 평생을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무대의 막후에서, 작업실 골방에서 뒷것을 자처하며 살아간 김민기의 삶을 처음으로 본격 조명한 헌정이었다. 3부 시청률(3.3%)이 동 시간대 전 채널을 통틀어 1위가 됐을 만큼 울림과 여운이 컸다. 군사독재정권에 쫓겨 또는 자발적으로 농사꾼으로, 탄광의 막장 인부로, 공장과 바다와 건설 현장에서 청춘을 보내고, 정의와 자유에 목마른 청춘과 핍진한 민중에 정신적 위로가 된 수많은 명곡을 지어내고, 지금은 최고 반열에 오른 수많은 가수와 배우들의 무명 시절 선생님이었던 보살 같은 사람. 겸손한 그 이름 석 자를 이제서야 전설로 커밍아웃한 우리가 무심했다. 그의 첫 번째 대표작 아침이슬로 돌아간다. 노랫말은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들이다. 진주보다 고운 아침이슬과 서러움, 떠오르는 태양과 묘지, 평화로운 아침 동산과 거친 광야. 세상은 어찌 한 가지 모습만 정답이겠는가. 설움이 맺힐 때 작은 미소를 짓고, 찌는 더위에 시련이 와도 저 거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주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긴 밤을 지새우고 찾아온 새벽. 그 여명의 풀잎에 맺힌 찰나의 깨달음. 아침이슬은 어둠과 빛과 설움과 극복이 응축돼 반짝이는 결정체다. 세월에 연마된 진주다. 자, 서러움은 모두 버려두고 나가자. 거친 세상의 모든 시련과 악수하고 마주해야 한다. 청아하고 단호하게 뻗어 올라가는 양희은의 힘찬 목청은 고단한 삶의 결연한 의지를 고양한다. 그런데 가슴 한편이 아려오며 눈물 한 방울 똑 떨어진다. 빛나는 은유적 가사와 아름다운 선율이 왜 슬픔을 줄까. 감동과 슬픔은 이웃이다. 각각의 이유로 누구에게나 삶의 고달픈 순간은 있다. 스무 살 새파란 청년이 만든 노래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유적이고 서정적이면서 기품 있는 아침이슬의 장대한 후폭풍은 그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 맑은 아침이슬에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밸 거라고는 몰랐다. 1972년 유신 철폐 시위,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에서 때론 백만 명이 넘는 이들이 신촌에서, 서울역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터져라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상의 페이지는 넘어갔다. 노래의 태생은 저항이 아니었다.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들어간 후 이사 간 우이동 집 반지하 창고를 작업실로 쓰며 그림을 그리다 붓이 안 나가서 즉석에서 만든 노래라고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 동네에는 야산도 있고 무덤도 있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고 묘지 근처에서 잠들었다가 아침 햇빛에 깨어났을 때의 경험을 옮긴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다. 그는 투사가 아니었다. 이 노래가 광장에서 투쟁의 도구로 불릴 때,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에서 농사를 짓고, 어두운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캤고, 김 양식장에서 일당 잡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정권이 감시하고 고문하고 회유할 때 저항하지 않고 은둔의 길을 택했다. 투쟁하여 쟁취하는 선동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그럴수록 낮은 곳으로 내려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성찰하고 극복하고 각성했다. 군사정권이 그의 첫 앨범 전체를 금지곡으로 만들고 그를 주시한 것이 자신과 자신의 노래와 정권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이다. 혁명과 대중과 천재와 예술은 이렇게 아이러니한 관계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터진 날, 어린이들을 위한 해송유아원 건립 기금 마련 공연에 목숨 걸고 참석해 노래하는 김민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자료=SBS 프로그램 갈무리) 만일 한국의 밥 딜런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김민기다. 그만큼 문학적 영감과 음악적 재능을 동시에 지녔던 뮤지션은 찾기 어렵다. 그는 섬세한 지적 자의식과 자신과 타자의 삶,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스스로 힘들게 걸어간 회의적 지식인이다. 누군가는 윤동주 시인과 결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음악적으로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어낸 천재 뮤지션이었다. 다만 그는 남 앞에서 기타를 둘러메고 얼굴 내밀고 노래한 적이 거의 없다.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노래를 못한다고 했고, 자기 노래를 듣는 것조차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서 듣기 싫다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과 다른 지점이며 어쩌면 더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인터뷰에서는 내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그는 스스로 쟁이 기질이라고 했다. 어제의 작업을 부정하고 늘 새로운 걸 찾았다. 나이 마흔에 극단 학전을 만들어 올 3월 폐관할 때까지 33년간 운영하며 갈 곳 없는 가수와 배우들에게 무대를 내주고, 뮤지컬을 만들고, 아동극에 전념하기도 했고,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아침이슬은 장안에 노래 좀 부른다고 소문난 풋내기 양희은의 운명도 바꾸었다. 1971년 한 노래모임에서 우연히 이 노래를 듣게 됐고, 찢어진 악보를 주웠다(지금도 그 악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노래에 감동한 양희은은 재동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민기를 졸라 첫 앨범 양희은의 고운 노래 모음에 넣었다. 시각 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현 기타로,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로 반주해 주었다. 아침이슬이 처음 대중에 선을 보인 음반이다. 그해 조금 늦게 김민기는 자신의 유일한 정규앨범이 된 김민기의 사이드 B에 이 노래를 실었다. 재킷은 우울한 보랏빛이다. 사이드 A의 첫 곡은 친구였다. 두 사람의 노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양희은의 것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듯 단호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 김민기는 그저 낮은 음정으로 담담하게 읊조릴 뿐이다. 양희은 버전과 반대로 착 가라앉은 숙연한 분위기다. 양희은이 대중에 더 알려지면서 이 노래를 그의 오리지널로 아는 사람이 많다. 양희은은 이 노래를 평생 일만 번 이상 불렀다고 한다. 아침이슬이 수록된 김민기 1집과 양희은 1집. 1971년 김민기는 양희은에게 먼저 이 노래를 주었고, 몇 달 후 자신의 앨범에 실었다. 김민기가 스무 살, 양희은이 열아홉이었다. (자료=네이버지식백과) 음악은 창작자의 의지를 떠나 듣고 부르는 이들에 의해,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고 의미가 새롭게 부여된다. 각자에 의해 각자의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게 좋은 음악의 생명력이다. 김민기의 많은 명곡(다음 편)은 그걸 증명하는 데 충분하다. 1987년 6월 시청 앞 군중 속에 나도 있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이 목이 터지게 아침이슬을 부르는 걸 난 처음 봤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들 너무 절절하게 부르니까. 더 이상 내 노래가 아니었다. (2018년 9월, JTBC인터뷰)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2024.05.29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 한·일·중 정상회의: 포용외교 개시의 분수령이 되다 반길주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우여곡절 끝에 2024년 5월 2627일 이틀간 한일중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한일중 정상회의는 2011년 9월 출범한 3자 협의체로 3개 국가가 교대로 2년씩 사무총장을 맡는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 최근 국제정치가 신냉전 역학에 직면한 가운데 오커스 등 소다자 협의체가 주목받고 있는데 한일중 정상회의는 이보다 앞서 출범한 동북아 소다자 협의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냉전 구도라는 도전에 직면해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유사 입장국과 비유사 입장국이 모두 포함된 소다자 협의체라는 성격이 발목을 잡은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이후 4년여 만에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리면서 동북아 소다자 협의체가 제 기능을 찾는 단초가 됐다. 3국 정상은 이번 회의를 통해 공급망 안정, 인적 교류, 공중보건 등에 대해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회의 후에는 공동 기자회견도 열었다. 이번 회의에서 3국 정상회의 정례화 및 협력 제도화 추진에 합의한 것은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3자 경제협력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확인한 부분이다. 3국 정상과 경제인이 소통하는 한일중 비즈니스 서밋자리가 마련된 것은 이러한 의지를 정책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일중 정상회의 성과는 단지 3자 회의에 그치지 않는다. 한중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양자외교를 통해 외교안보대화 신설, 공급망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한일도 양자 정상회담을 가져 수소 공급망 협력을 모색하고 셔틀외교도 잘 이어가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 중국 총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서울에서 개최했다는 점에서 이번 한일중 정상회의는 한국 특유의 포용외교 개시의 분수령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현 정부는 출범 후 약 2년간 안보외교를 통해 안보달성 기초를 굳건히 다지는데 진력해 왔다. 대표적으로 역대 최강 한미동맹을 통해 탄생한 핵협의그룹(NCG)과 한미일 안보 아키텍처를 들 수 있다. 한편 안보외교는 본질적으로 유사 입장국과의 협력에 방점을 둔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비유사 입장국과의 소통 강도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유사 입장국인 중국도 포함된 소다자 협의체가 성사됨으로써 한국의 외교가 1단계인 안보외교에서 2단계인 포용외교로 진화되는 첫발을 내딛는 기회가 됐다. 한국 정부는 이미 포용 원칙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2022년 발표한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3대 협력원칙 중 하나로 포용을 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포용외교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비유사입장국인 중국과 소통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도 한국의 협력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최근 한중 양국은 소통 강화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보여왔다. 한국의 포용외교 정책화는 최근 한중 양측이 관계 개선을 이루고자 노력해 온 여건 조성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지난해 9월 한국 대통령과 중국 총리는 아세안 계기에 양자회담을 통해 한일중 정상회의 추진 동력을 살렸다. 이후 한국의 국무총리는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한 후 이 계기에 중국 주석과 회담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상급 인사의 외교전선 관리는 11월 부산에서 한일중 외교장관회의로 이어졌고 올해 5월 조태열 외교장관의 베이징 방문을 통해 성숙했다. 이러한 외교 마라톤을 거치며 마침내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가 성사됐고 의미 있는 성과도 달성했다. 포용외교 정책화의 사례인 이번 한일중 정상회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그 함의를 진단해 볼 수 있다. 첫째, 유사 입장국이 비유사 입장국과도 협력의 공간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신냉전 구도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 포용외교 정책화 현시로 한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의 신인도도 높아지는 시너지 창출도 기대할 수 있다. 둘째, 지지부진했던 한중 정상회의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 통상적으로 다자회의 계기에는 양자외교도 활성화된다. 마찬가지로 이번 3자 회의에서도 한중 양자회담이 진행됐다. 이를 통해 한중 외교안보대화 신설에 합의했고 한중 FTA 협상 재개의 물꼬도 트였다. 교착상태가 풀리고 있는 한중관계의 동력을 잘 살린다면 명실상부한 한중 정상회담도 가능할 것이다. 외교 관례상 시진핑 주석의 한국 답방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일중 정상회의는 이러한 외교 관례가 현실화하는 초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셋째, 앞으로 시험대를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한일중 정상회의 개최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이번 소다자 협의체는 오커스, 쿼드, 한미일 협의체 등 다른 소다자 협의체와 지속해서 비교 대상이 될 것이다. 한일중 정상회의가 작은 변수 하나로 인해 다시 멈추기라도 한다면 신냉전 시대에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소다자 협의체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한일중 정상회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인식으로 후속 조치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또 후속 조치에는 포용외교의 성격을 잘 살리려는 노력이 반드시 담겨야 할 것이다. 2024.05.28 반길주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소재가 된 그리스 로마신화 프랑스 남서쪽에는 인류가 마지막 빙하시대를 살았던 구석기시대 유적인 라스코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황소들이 그려져 있는데, 황소그림 주변을 살피다 보면 여러 점들이 표시돼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점들은 고대인들이 폴리아데스 성단과 오리온 별자리를 그린 것이다. 폴리아데스 성단이 바로 황소자리에 있는 산개성단이고 오리온자리 또한 황소자리 바로 옆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동굴생활을 하던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은 밤하늘을 보며 별을 상상하고 별자리를 기록했다. 그리고 인류가 의사소통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별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스 신화인 아틀라스와 플레이오네의 일곱 딸 플레이아데스 이야기는 폴리아데스 성단에서 나왔으며,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도 폴리아데스 성단은 언급되고 있다. 한편 싸움 도중 전갈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 포세이돈의 아들 오리온 이야기 또한 그 유래가 별자리다. 전갈자리의 위치와 형상이 오리온 자리를 노리고 있고 서로 상극인 겨울과 여름 하늘에 잘 보이기 때문이다. 즉 별자리 위치에 따라 신화의 스토리들이 생겨났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서양의 별자리 점성술이 오래 전부터 발전해 온 것도 이런 연유이지 않을까 싶다. 우주의 먼 곳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되어 서양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 음악적 언어로 변하여 우리 곁에 다가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신화의 이야기들이 어떤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소재가 되었을까?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고대 그리스·로마실에서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 언론공개회를 찾은 관계자들이 로마 신화의 대리석 흉상을 감상하고 있다. ◆ 헨델 : 헤라클레스의 선택, HWV 69 헨델의 오라토리오 헤라클레스의 선택은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영웅 스토리는 각종 영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소재로 활용되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신들의 왕 제우스와 미케네의 왕 엘렉트리온의 딸 알크메네의 아들로 태어난 반신반인 헤라클레스는 그 출생부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많은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헤라클레스 역시 여름철 북쪽하늘에서 볼 수 있는 큰 별자리이기도 하다. 헨델은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풀고 있다. 오페라처럼 연기 동작이 없고 주로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는 오라토리오지만 작품 헤라클레스의 선택에서는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의 비중이 상당하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합창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영국적 오라토리오에 이탈리아 오페라적인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연주시간만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이 작품의 스토리는 작가 토마스 브루톤(Thomas Broughton)의 대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오비드의 변신이야기와 세네카의 오이타의 헤라클레스그리고 소포클레스의 트레키스 여인들 등의 고대 작품에 상상력을 더하여 대본을 완성하였다.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의 영웅적인 에피소드를 주제로 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공주 이올레(Iole)와의 관계, 아내 데이아네이라(Deianira)의 질투, 그로 인한 영웅의 파국을 그리고 있다. 헨델은 이 작품을 4주만에 완성하였으며 런던왕립극장에서 초연하였다. 초연 이후 작품은 글룩(C.Gluck) 이후 최고의 음악 극작품, 가장 위대한 성취 등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장르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존재한다. 사실 오늘날에는 이 작품을 오라토리오 장르로 분류하지만 성서에 기반한 종교적 작품이 아니어서 애매한 측면도 존재한다. 그래서 헨델 자신도 이 작품을 음악극(A Musical Drama)이라고 기록 하였으며, 때때로 합창 오페라, 영국 오페라, 신화적 오라토리오 등 다양한 장르로 부르기도 한다. ◆ 베토벤 :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Op. 43 헤라클레스가 12가지 과업을 할 때 아틀라스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 신이 있었다. 바로 먼저 생각하는 자인 프로메테우스다. 그의 아우가 나중에 생각하는 자인 에피메테우스인데, 책의 서문을 뜻하는 프롤로그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맺음말을 뜻하는 에필로그는 에피메테우스로부터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 불을 가져다 주어 제우스로부터 코카서스절벽에 묶이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제우스의 독수리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제거되고 제우스도 형벌을 풀어주고 소원을 들어주면서 더 이상 신화세계에서 등장하지 않게 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과 참 가까운 신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선물한 불은 인간에게 엄청난 선물이었다. 인류는 불을 다루게 되면서 위협적인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우리의 뇌가 발달하고 커진 것 또한 단순한 육식이 아닌 불에 익힌 고기를 먹으면서 발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손자인 헬렌은 고대 그리스의 주요부족들인 도리아인, 아카이아인, 이오니아인, 아이올리인으로 퍼져나갔다. 헬렌은 우리 식으로 보자면 단군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만나 융합된 헬레니즘은 이 헬렌에서 유래된 것이다. 베토벤은 프로메테우스를 소재로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이라는 발레음악을 작곡 하였다. 베토벤과 발레는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지만 그는 총 두 개의 발레작품을 남겼고,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은 작품번호가 있는 유일한 발레작품이다. 이 작품은 살바토레 비가노(Salvatore Vigano)라는 이탈리아 무용수와 협력 속에서 탄생되었는데, 작곡가 보케리니(Boccherini)의 조카이기도 한 비가노는 원래 자신의 작품을 직접 작곡하여 공연하는 다재 다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에게 작품을 선보이는 이 공연은 그에게도 굉장히 중요하였고, 그래서 작곡을 베토벤에게 맡긴 것이다. 작품은 전체 2막으로 서곡과 서주, 15개의 섹션과 피날레로 구성되어 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작품의 멜로디는 에로이카 교향곡 등에 차용되었다. 작품은 1801년 비엔나의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현재는 전곡이 아닌 주로 서곡위주로 연주되고 있다. 베토벤이 하프를 사용한 유일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참신함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 드뷔시 : 목신의 오후 전주곡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프랑스의 상징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의 시 목신(牧神)의 오후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목신은 목동과 초목의 수호신으로 상체는 뿔 달린 사람이고 하체는 염소, 즉 반인반수(半人半獸)이다. 목신은 제우스와 님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기괴한 모습으로 태어나서 어머니 님프로부터 버림 받았다. 그래서 목신은 꿈속에서는 악몽을 불어넣는 존재이며,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는 공포감을 주어 괴롭히는 신으로 종종 등장한다. 루벤스등 바로크 회화 속에 등장하는 사티로스도 일종의 목신인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판(Pan)으로 불린다. 이는 공포를 뜻하는 패닉(Panic)의 어원으로 하고 있다. 술과 음악의 신 디오니소스의 시종답게 목신 또한 시링크스라는 팬플루트를 가지고 다녔으며 가무를 즐긴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시링크스는 원래 아름다운 님프인데 목신으로부터 피해 다니다 갈대가 되었고, 목신이 그 갈대를 꺾어 악기로 만든 것이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첫마디는 바로 시링크스를 묘사한 플루트의 아름답고 오묘한 소리로 시작된다. 시인 말라르메는 자신의 시와 드뷔시의 음악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며 그의 음악을 높이 칭송했다. 당시 말라르메의 시는 매우 상징적이며 서정적이고 극적인 요소들이 모두 혼합되어 어떤 성향의 시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주류에서는 배척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뷔시 등 당시 관습적이며 틀에 박힌 예술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예술가들에게는 많은 상상력을 주었다. 주류에 배척당한 목신의 오후 시집 또한 공을 들여 자비로 출판하였는데, 시집의 삽화는 에두아르드 마네가 그려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드뷔시의 작품 또한 초연 당시 애매하고 불명확한 음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 당시 음악은 신고전주의와 후기낭만주의가 주류였는데, 드뷔시의 음악은 조성을 알 수 없고 기존 화성법칙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다. 바그너와 같이 한두 소절만 들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한 음악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그는 의미의 모호함과 음의 색채화로 감상자에게 상상과 해석의 자유를 던져준 것이다. 이는 말라르메의 시뿐만 아니라 신화가 가진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과도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드뷔시가 작품 제목에 전주곡(Prelude)이라고 붙인 형식 또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 그의 의중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전주곡은 첫 악장을 준비하기 전 연주되는 자유로운 기악형식의 곡인데 사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교향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렇듯 드뷔시와 말라르메의 작품은 예술가가 의도한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기존 감상자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각자 해석의 자유가 더 주어진 감상자라는 측면에서 현대예술의 시작을 알린다고 할 수 있겠다. ☞ 음반추천 헨델의 헤라클레스의 선택은 독일의 괴팅겐 헨델 페스티벌을 이끌고 있는 로렌스 커밍스(Laurence Cummings)의 지휘와 괴팅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추천하겠다. 바로크음악의 대가인 존 엘리엇 가디너 경(Sir. John Eliot Gardiner)의 음반도 빼놓을 수 없다.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은 오르페우스 실내 관현악단(Orpheus Chamber Orchestra)이 1987년에 녹음한 음반과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Freiburger Barockorchester)의 연주를 권한다. 마지막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은 샤를 뒤뜨와 (Charles Dutoit)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오케스라의 연주를 좋아한다. 많은 명연들이 있지만 과하지 않고 서정적인 앙드레 프레빈(Andre Previn)의 연주 또한 섬세하고 훌륭하다.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igenartig@naver.com 2024.05.27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 사회적 교육·돌봄체계로서 늘봄학교 정착과 향후 과제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최근 극심한 저출생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돌봄체계에서 사회적 교육·돌봄체계로의 변화다. 2000년대 초반 정부는 저출산 현상의 주요인으로 기혼부부가 일을 하러 나갈 때 아이들이 갈 곳이 없음에 주목했다. 그 결과 어린이집의 대폭 확대가 이뤄졌다. 아이를 부모가 아닌 사회가 돌봐준다는, 이른바 탈가족화된 사회적 돌봄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2012년 사회보장기본법 전면 개정을 통해 출산과 양육이 실업, 노령, 장애, 질병, 빈곤 및 사망 등과 더불어 사회적 위험으로 규정됐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더 이상 가족만의 과제가 아니라 국가·사회적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돌봄체계의 확대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즉 영유아기 아동 대상에만 머물렀다. 그 결과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는 유령 중 하나가 초등 돌봄절벽이다. 엄마만이 경험하는 독박육아와 경력 단절은 근본 원인 중 하나다. 게다가 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아이에게 교육격차로서 대물림되는 현상마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늘봄학교는 초등돌봄절벽과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한국사회의 시대적 과제다. 영유아기 아동 대상 사회적 돌봄체계를 확립한 한국 사회가 교육에 대한 욕구가 더 커가는 초등기 아동 대상 교육과 돌봄을 부모가 취업 활동을 하는 사이에 책임지는 사회적 교육·돌봄체계를 도입하는 과정의 산물이 늘봄학교다. 영유아기 아동을 대상으로 한 사회적 돌봄체계도 유보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돌봄에서 더 나아가는 교육·돌봄체계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초등기에 초등 돌봄교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교육·돌봄체계로서 늘봄학교는 유보통합과 연계해 우리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학교별로 강사 개인의 역량이나 전공 분야에 의존해 이뤄지고 있는 방과후 과정을 체육, 문화·예술, 사회·정서, 창의·과학, 기후·환경 등의 분야로 체계화해 늘봄학교 맞춤형 프로그램의 얼개를 만든 이유도 사회적 교육·돌봄체계로서의 늘봄학교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다. 경기 화성 송린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방학 중 오후 돌봄프로그램에 참여해 책 읽기 활동을 하고 있다.(사진=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2023년 시범사업을 실시하면서 늘봄학교는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초등돌봄교실 대기 수요를 흡수했고 아침·저녁 돌봄과 틈새돌봄의 자리를 대신해 줌으로써 학부모와 아동에게 만족스러운 호응을 얻었다. 반면, 교육청이 보내준 시범사업 예산을 집행하는 역할을 개별 학교가 수행함으로써 교사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초등돌봄교실이 도입되던 과정에서 교사가 감당해야 했던 부담이 재현되는 양상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늘봄학교는 압도적 다수로 부모와 아동의 높은 만족도와 대다수 교사의 반대라는 경계선에 위치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미래교육돌봄연구회는 늘봄학교에 대한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주요 대책 중 하나로 교사의 업무 부담 경감을 위한 지원체계의 구축을 권고했다. 시범사업 첫해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24년형 늘봄학교에서는 교육청의 늘봄지원센터와 개별 학교의 늘봄지원실 체계가 함께 등장했다. 늘봄학교 업무 자체가 교사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각 센터 표현 그대로 지원체계를 확립하는 변화다. 또 늘봄학교 도입은 교사 부담 증가라는 현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시도다. 각 학교 내 늘봄지원실에 늘봄실무직원, 늘봄전담사, 늘봄프로그램 강사로 구성된 인력이 늘봄학교 업무를 전담하는 체계를 통해 교사가 더 이상 방과후 돌봄·행정 업무를 맡지 않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늘봄지원실 인력체계를 이른 시일 안에 배치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24년형 늘봄학교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갖는다. 돌봄교실, 방과후학교, 늘봄학교라는 현재의 체계를 극복하고 명실상부하게 초등 방과후·돌봄 이중체계를 통합한 늘봄학교 단일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아직은 돌봄교실, 방과후 교실, 늘봄교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초등돌봄서비스와 방과후 프로그램이 늘봄과정으로 통폐합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늘봄학교가 탄생해야 한다. 장애아, 이주배경 및 저소득층 아동 등이 개인적 배경과 관계없이 늘봄학교에서 양질의 교육·돌봄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원 강화도 있어야 한다. 늘봄학교의 정착을 위한 학교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할 뿐 아니라 학교 밖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원과의 연계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과대·과밀학교의 경우 지역사회의 다양한 공간 및 아동돌봄 기관과 협력해 가칭 지역늘봄협의체를 구성하는 변화를 기대해 본다. 2024년을 넘어 늘봄학교의 성공적 정착·확대를 위한 기본 토대로서 (가칭)늘봄학교지원특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 늘봄학교 운영을 위한 공간과 인력 확보,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 아동돌봄 기관과의 연계·협력 체계 구축, 안정된 예산 확보 등을 위해서는 늘봄학교의 법률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사회보장기본법에서 제시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양육에 대한 국가 책임 이행을 위한 특별법으로서 늘봄학교 관련 법 제정이 뒤따르기를 기대해 본다. 부모와 아동이 만족하는 늘봄학교가 시작됐다. 초1·2학년 대상 맞춤형 프로그램은 무료 제공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의 양적·질적 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 인프라를 한국 사회는 이미 높은 수준에서 갖고 있다. 게다가 지자체에 현존하는 도서관, 박물관, 문화·예술 및 체육 시설 등을 활용한다면 부모와 아동 당사자의 만족감은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교사와 늘봄전담사, 늘봄프로그램 강사가 만족하는 성과를 거둬야 한다. 24년형 늘봄학교를 거쳐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한국형 사회적 교육·돌봄체계의 정착을 기대해 본다. 2024.05.27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 힙합음악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돕는 영화, <셀마> 영화 셀마 포스터 (사진=기고자 제공) 셀마는 미국의 목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마틴루터킹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기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틴루터킹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 순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흑인 투표권 투쟁을 위해 1965년에 벌어진 셀마-몽고매리 행진에 집중한다. 미국 인권운동사에서도, 마틴루터킹 개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해 말이다. 셀마는 비슷한 영화 몇몇을 떠올리게 한다. 흑인 인권을 다뤘다는 점에서 일단 버틀러나 노예12년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와 주제를 보다 정교하게 제한한다면 미시시피버닝이 생각난다(이 영화는 1964년, 미시시피 주의 흑인 투표권 등록을 돕기 위해 남부로 향하던 청년 민권운동가 세 명이 살해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편 주인공을 크게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겟온업(제임스브라운)이나 레이(레이찰스)를 소환한다. 셀마에서 마틴루터킹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좌절도 하고 포기도 하고 싶었던 평범한 인간처럼 그려진다. 또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 마틴루터킹의 여성 편력에 관해 감독은 굳이짚고 넘어간다. 그러나 마틴루터킹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욱 완전해진다. 셀마는 뛰어난 영웅 한 명이 혼자 마법을 부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틴루터킹과 그의 조력자들, 더 나아가 모든 용기 있는 시민이 힘을 합쳐 세상을 한 걸음 더 내딛게 하는 이야기다. 여전히 사람들이 영웅의 출현을 갈구하는 지금, 셀마는 묘한 울림을 안긴다. 이 영화의 주제가 Glory는 래퍼 커먼과 알앤비싱어 존레전드가 불렀다(커먼은 영화에 조연으로도 출연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 상을 받았다. 이와 별개로 영화의 예고편 영상에도 음악이 흐른다. 이 음악은 퍼블릭에너미의 Say It Like It Really Is다. 힙합을 가리켜 Black CNN이라고 명명했던 왕년의 힙합 그룹 말이다. 셀마와 힙합의 이런 관계. 우연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힙합은 특정한 인종과 지역에 기반해 시작된 음악이다. 또한 힙합은 음악이자 문화이고 더 나아가 삶의 방식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미국 흑인의 역사/사회/정치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힙합 매거진으로 불리는 소스에서는 1965년에서 1984년 사이에 태어난 미국 흑인을 가리켜 힙합제너레이션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이 바로 미국 흑인 시민권 평등 운동(1955~1968)의 끝자락, 그리고 '블랙파워 운동 중후반기에 피어나기 시작한 힙합과 함께 성장하거나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자란 힙합 세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힙합과 무관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힙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로널드레이건이 그렇고 무하마드알리가 그렇다. 1980년대 미국을 강타했던 크랙에피데믹이 그렇고 1990년대 초반의 LA폭동이 그렇다. 마틴루터킹 역시 힙합과의 연결고리를 도저히 끊어낼 수가 없다. 아니, 마틴루터킹은 힙합 커뮤니티가 현재 가장 숭배하는 아이콘이다. 재미있는 것은 힙합의 초창기에는 마틴루터킹보다는 말콤엑스가 래퍼들에게 환영받았다는 사실이다. 비폭력과 평화를 논하는 마틴루터킹보다는 흑인우월주의와 무장투쟁을 외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저항을 주장하는 말콤엑스가 아무래도 힙합의 공격성/저항성에 부합했기 때문일까. 초창기 힙합 명작으로 회자되는 부기다운프로덕션의 앨범 타이틀이 [By All Means Necessary]인 이유도, 퍼블릭에너미의 노래 Bring the Noise의 인트로가 Too Black, Too Strong인 이유도, 이게 다 말콤엑스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래퍼들은 마틴루터킹의 정신 역시 가사에 새겨 넣기 시작했다. 의도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힙합은 대중화/상업화의 길을 밟으면서 팝과 유행의 옷도 껴입게 되었다. 몸집도 더욱 거대해졌다. 즉 마틴루터킹과 힙합의 연결고리는 변화해온 시대의 요청에 미국 흑인과 힙합 문화가 조화롭게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셀마가 현재진행형임을 알리고, 마틴루터킹의 꿈을 이어갈 수 있는 음악은 역시, 아무래도 힙합이다.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 혼자선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 필요한 건 노인의 지혜와 젊은이의 에너지/ 우리가 부르는 승리의 이야기(Glory중) ◆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 힙합에 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음악과 예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고, 최근에는 제이팝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힙합 에볼루션, 힙합의 시학 등이 있다. murdamuzik@naver.com 2024.05.24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
-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과 서거 140주년 체코는 약 1000년 전에 블타바 강변의 언덕 위에 세워진 프라하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후 16세기 유럽의 중심지가 됐고, 그 후에는 약 30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독일권에 완전히 편입됐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됐다. 그 후 나치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 등을 거친 다음에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지는 등 여러 차례의 격동기를 거쳤다.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도 수도 프라하는 아름다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블타바 강이 흐르는 프라하. 오른쪽 강변 건물이 스메타나 박물관이다. 주옥같은 도시 프라하는 수준 높은 음악적 분위기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실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보다 더 사랑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일 년 내내 여러 고품격 음악회가 프라하의 주요 공연장을 중심으로 체코 전역에서 풍성하게 열리고 있는데, 2024년은 10년마다 찾아오는 체코 음악의 해다. 공교롭게도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이 태어난 해, 또는 서거한 해는 4로 끝나는 해다. 게다가 올해는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이자 서거 140주년이며, 드보르작 서거 120주년인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의 명성을 잇는 체코 음악가 야나첵(1854~1928)의 탄생 170주년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다. 체코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이 명칭으로 대중 앞에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 1894년이니, 이 오케스트라도 올해 130주년을 맞는다. 따라서 체코는 10년마다 4로 끝나는 해를 음악의 해로 지정해 대대적인 음악제를 여는 것이다. 블타바 강변의 스메타나 동상. 체코 음악의 아버지는 단연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다. 그의 대표작은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오페라 「팔려 간 신부」, 현악 4중주 「나의 삶으로부터」 등이 먼저 꼽힌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라하에서 약 160㎞ 동쪽에 위치한 리토미슐로 인구 1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고 아담한 도시다. 리토미슐 시내 중심에서 약 5백 미터 동쪽 언덕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리토미슐 성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성에는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150석 정도의 아담한 바로크 양식의 극장이 눈길을 끈다. 바로 이 극장에서 1830년 10월, 여섯 살의 스메타나는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초대받은 귀빈들을 놀라게 했다. 스메타나의 고향 리토미슐의 성. 그의 아버지는 리토미슐 성에 딸린 맥주 양조장 관리인이었다. 스메타나는 양조장 건물과 붙은 집에서 1824년 3월 2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로 현악사중주에서 연주하기도 했기 때문에 어린 스메타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에서 체코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기 때문에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만 체코어를 썼을 뿐이었다. 리토미슐 성 근처 스메타나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집 내부. 스메타나는 15세 때인 1839년에 학교를 수도 프라하로 옮겼고, 프라하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는 음악의 길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 후 1848년 프라하에서는 민족주의에 심취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오스트리아 정부군에 맞서 항전을 벌였는데 그는 이 봉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오스트리아의 무자비한 탄압만 몸소 겪었을 뿐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체코 사람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는 음악에 체코 민족의 혼을 불어넣으면서 체코 음악을 좀 더 근대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일어를 쓰던 체코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체코어 이해력이나 구사력은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중부 유럽음악의 주류에 뿌리를 두고 체코의 역사, 영웅담, 전설, 민속 등과 같은 요소를 첨가시키거나 체코의 풍경을 표제로 하는 등 체코 음악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의 음악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체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며 그들 마음속에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불길이 타오도록 했다. 즉 그는 체코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당시 유럽음악계의 황제 리스트는 그의 음악적 능력을 인정하고는 그를 순수한 체코의 정신을 타고난 작곡가이며 신의 은총을 받은 예술가라고 극찬했다. 비셰흐라트 언덕 묘지의 스메타나 묘소. 하지만 음악가인 그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닥쳐왔다. 다름 아닌 청력장애였다. 그럼에도 그는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연작교향시 「나의 조국」이다.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이 교향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곡 비셰흐라트와 블타바 강은 1874년에 작곡했고 나머지 네 곡은 그가 청력을 완전히 잃은 다음인 1879년에 완성했다. 그런데 침묵의 세계에서도 창작열에 불타던 그에게 운명의 신은 계속 가혹했다. 정신착란증까지 겹쳤던 것이다. 그는 1884년 5월 12일 프라하의 정신병동에서 60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는데 그의 모습은 매우 평온했다고 한다. 마치 운명의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듯. 그의 시신은 모든 체코 국민의 애도 속에 블타바 강변 비셰흐라트 언덕 묘지에 안장됐다. 지금부터 꼭 140년 전의 일이었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2024.05.22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 우주항공청, 이제 대한민국 우주항공 컨트롤 타워로 황창전 한국항공우주학회 회장 항공우주인 모두가 염원한 대한민국 우주항공 컨트롤 타워인 우주항공청 개청을 매우 환영한다. 모두와 함께 큰 기대 속 신속한 정착을 위해 적극 응원한다. 우리 학회는 2023년 12월 4일 유관학회와 공동으로 여·야·정 합의한 우주항공청 설립, 대한민국 항공우주산업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된다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해 조속한 의결을 촉구한 바 있다. 또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우주청 설립을 촉구하는 언론 인터뷰 등 노력도 힘을 보태어 지난 1월 9일 마침내 우주항공청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리고 5월 27일 개청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많은 노력을 해주신 모든 분께 존경을 표하고 감사드린다. 우주항공 분야에 국가적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점은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 산업, 인재양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적 역량을 총결집한 일사불란하면서 전문적인 전략과 추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모두가 바라던 바다. 특히 뉴스페이스 시대의 선두국가, 기업들의 우주경제 선점을 위해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신성장 주력산업의 대표적 후보인 우주항공산업 육성 측면에서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정부에서 발표한 2045년 우주경제 글로벌 5대 강국 실현이라는 비전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 2032년 달착륙, 2045년 화성탐사, 2045년 주력산업 수준인 매출액 420조 원 달성 등의 목표는 항공우주인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목표다. 경남 창원 의창구 경남도청 정문에 설치된 국산 우주발사체 누리호 모형 옆에 우주항공청 개청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매출액 420조 원 달성 목표는 세계시장의 10% 점유를 의미한다. 또 필자의 약식 계산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의 약 10% 수준(연평균성장률 2.7% 가정)으로 주력산업으로서 손색이 없는 규모의 목표다. 2022년 기준 우주산업 매출은 2조 9500억 원, 항공산업 생산은 6조 3400억 원으로총 10조 원이 조금안 되는 수준인데, 2045년 420조 원을 달성하게 되면 우주항공 기업 수 3배 증가(2000개 이상), 우주항공 일자리 25배 확대(50만 명 이상), 우주항공 100대 기업 3배 배출(10개 이상) 등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러므로 5대 강국 달성을 위한 성공의 열쇠는 매출 420조 원 달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매출액은 연평균성장률 18.5%인 경우 달성 가능한데, 2030년경에는 약 33조 원을 달성하고 2037년에는 100조 원을 돌파해야 한다. 우주항공청 개청에 따라 혹자는 플래그쉽 또는 시그니처 사업으로 우리와 경제 규모나 연구개발 투입 규모가 월등히 차이 나고 또 관련 생태계가 매우 다른 미국 NASA, 유럽 ESA, 일본 JAXA를 예로 들며 거창한 국제협력사업을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 분야 국고투자사업의 Go, No Go 판정을 위한 주요 잣대로 2045년 420조 원 매출 달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로 판정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이 잣대의 방점은 420조 원 달성에도 있지만 2045년 달성에도 있다. 당장 매출로 이어지지 않지만 2045년 매출기여도를 고려한 핵심 선행 투자도 포함하는 것이다. 매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장 경쟁력이 있는 제품 혹은 서비스를 확보해야 하는데, 소극적으로는 수급 동향 상에도 파악되듯이 생산액에 버금가는 수입액을 줄이는 국산화를 고려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목표 달성과는 거리가 매우 멀고 결국 신제품 또는 서비스를 개발·확보해 세계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제협력을 고려할 수도 있으나 우리의 전략적 가치가 있어야 효율적인 국제협력이 가능하다. 뉴 스페이스 시대, 민관 협력으로 세계 5대 우주 강국 도약. (인포그래픽=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전략적 가치로는 충분한 개발비 지원, 탁월한 기술 보유, 풍부한 확정시장 보유를 꼽을 수 있으나 이 가운데 그나마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은 기술이다. 핵심 기술의 확보야말로 국가적 우주경제 로드맵 달성의 열쇠다. 또 탁월한 핵심 기술이 있어야 막대한 국외 기술이전료도 불필요해지며 국제협력도 효율적으로 가능해진다. 핵심 기술 확보의 선순환 구조를 조기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고나 펀드를 통한 RD 예산의 선제적 투입이 마중물로써 필수다. 선순환 구조는 기업의 매출이 올라가면 5~10%의 RD 재투자(예: Airbus 24년 1분기 RD 투자 매출 5.7%)로 이어지는 구조를 의미하며, 지속성을 비롯해 핵심기술의 확대 재생산에 있어 중요하다. 예산의 선제적 투입은 관련 인력의 선제적 양성에도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패스트 팔로워가 아닌 퍼스트 무버로 갈 아이템에 대한 논의가 과학기술 및 산업 전반에서 나오고 있는데, 우주항공분야도 통찰력을 갖고 한 단계, 두 단계를 뛰어넘는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 우주항공산업 매출의 63%는 항공에서 나온다. 특히 도심항공모빌리티(UAM/AAM)와 K-항공방산과의 연계 개발은 매출 목표 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도심항공모빌리티는 2040년경 1조 USD(모건스탠리 전망)에 달하는 시장으로, 우리나라가 자동차 수준인 10% 점유 때 130~140조 원 매출로 이어질 수 있는 태동기의 시장이다. K-방산의 전투기, 헬리콥터, 무인기, 첨단엔진 등도 국내 산업 생태계를 단단히 하며 내수에 기반한 트랙 레코드로 세계시장을 점점 더 점유할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다. 우주로 가기 위해서는 대기권을 지나야 하고 우주비행기, 공중발사뿐만 아니라 화성헬기인 인제뉴어티처럼 공중탐사를 위해서도 항공기술이 사용된다. 항공기술은 우주기술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우주항공청으로 이관되는 항공우주산업개발촉진법에는 기본계획 수립을 비롯한 항공과 관련한 여러 사항도 있다. 이는 시장 실패의 대표산업으로, 국가가 산업육성 발전에 관여해야 하는 항공산업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주로 고려되는 국가우주위원회-우주개발진흥기본계획뿐만 아니라 (가칭)국가우주항공위원회-우주항공산업기본계획 등으로 항공 분야를 포함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 항공-우주 간 균형발전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통상의 자동차, 조선 등 체계 개발 성격의 제조산업이 그렇듯, 부품이나 기술이 TRL6 단계 수준이 아니면 위험도가 높아 체계, 즉 완성품에 적용하기 곤란하다. 특히 항공우주체계는 브레이크를 잡고 서 있을 수 없어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항공우주 체계 개발에 6년이 소요된다고 하면, 구성품 개발 규격이 확정되는 기본설계 단계인 초반 1~2년 차까지는 TRL6에 도달해야 국산 기술, 부품을 체계에 적용할 수 있고 이는 선행 개발이 필수임을 의미한다. 문제는 현재 선행 개발을 할 경우 국고 지원을 받기 어려운데, 이러한 불합리를 타파해야 한다. 아울러 우주항공시장은 체계뿐만 아니라 구성품, 부품시장도 독과점 되어 있어 국산 체계에 장착한 트랙 레코드가 없으면 국외 체계의 공급망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므로 국산체계 개발이 이뤄지고 국산체계에 부품을 적용해야 부품업체의 매출이 발생하면서 국내 산업생태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과거의 안타까운 사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기대가 큰 만큼, 현재의 우주항공청 개청의 모습은 모든 이를 100% 만족시킬 수 없으나 국가적 컨트롤 타워로서 힘찬 출발을 앞두고 있으므로 앞으로 힘을 모아 채워나가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우주항공의 목표 달성을 위해 산·학·연·관·군이 우주항공청을 중심으로 원팀이 되어 비상해야 한다. 한국항공우주학회도 누적신입회원 9000여 명의 항공우주분야 대표학회로, 우주항공청을 적극 지원하고 항공우주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 5대 우주강국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24.05.22 황창전 한국항공우주학회 회장
- 일상 속 살아있는 보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김택동 국가인재경영연구원 사무총장/보훈미래특별위원회 위원장 보훈은 국가의 본질적 기능 영웅을 기리지 않으면 미래의 영웅이 나오지 않는다. 호국 영웅들이 흘린 피와 땀방울 위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을 예우하고 유족의 삶을 돌보는 건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다. 그걸 믿기에 또 누군가가 국가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몸을 던질 것이다. 보훈이야말로 국방력과 애국심의 근간이라고 하는 이유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제대로 대우하고, 그것이 하나의 보훈문화로 뿌리내리도록 가꿔갈 책임이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있다. 보훈은 그 나라의 국격이자 품격 선진국을 보면 보훈제도와 선양보훈문화 두 축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일치단결과 국가 발전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예로 미국의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의 보훈제도와 보훈문화를 시행하고 있어 자발적 애국심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은 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보훈은 새로운 도약의 출발선상에 있다. 지난해 6월 국가보훈부의 승격으로 세계경제 10위 국가에 걸맞은 보훈제도와 보훈문화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이다.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이라는 국정과제를 바탕으로 국가유공자 보상금 최대폭 인상, 위탁병원 이용 연령 폐지, 국가보훈등록증 통합 등을 추진했다. 또한 제복의 영웅들 사업을 통해 6.25참전유공자분들에게 국가적인 감사와 존경을 담은 새 제복을 전달했고 제복근무자 자녀를 위한 히어로즈 패밀리 사업도 추진되었다. 이외에도 직계후손이 없어 호적을 창설할 수 없었던 독립유공자 166명의 가족관계등록을 역대 정부 최초로 직권 창설했다. 부동산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했던 미국 LA에 위치한 흥사단의 옛 본부 건물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됐으며, 우리 정부가 지원한 독일 최초의 한국전쟁 참전비 제막식도 이뤄졌다. 지난해 6월 25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6.25전쟁 제73주년 행사에 영웅의 제복을 갖춰 입은 참전유공자들이 6.25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국민통합의 디딤돌, 국가보훈의 가치 재정립 필요 보훈은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기도 하다. 국민 통합과 사회 갈등을 완화하는 효과도 크다. 보훈정책은 국가공동체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보훈정책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구성원 간 국가공동체 의식의 함양 정도가 좌우될 정도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분열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국론을 모으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보훈은 계층과 이념의 간극을 넘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몇 안 되는 중요한 가치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국민통합의 여정에 보훈부의 큰 역할이 필요하다. 제복근무자향한감사와 예우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회 보훈이 과거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만 추앙하고 기리는 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을 기억하면서 우리 일상 속 살아있는 영웅에 대한 존중과 책임도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이 많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경찰, 군인, 소방관으로서 제복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일하는 이들을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 최근 순직의무군경의 날을 제정하고 평생을 헌신한 경찰, 소방관에게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부여 하는 등 제복근무자의 헌신에 걸맞은 예우를 강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들의 노고를 더욱 존중 예우하고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재취업, 창업 등을 지원하는 국가정책과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보훈의 미래: 시대와 국경을 넘는 인류애 실천 전 세계에서 지금 진행 중인 한국의 위상변화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국제사회에서 이미 한국을 전통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흥강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젠 국력과 국가의 품격에 맞는 국제보훈 협력을 강화해 새로운 대한민국 보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또한 해외 보훈제도를 연구해 우리나라 보훈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인류애를 실천하는 선진 보훈제도로 발전시켜야 한다. 보훈부의 향후 과제는 국민 눈높이 맞는 보훈 서비스의 질적 변화를 이루고 시대환경에 적합한 국민의 체감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훈정책 연구기관을 설립 후 보훈문화와 보훈정책 개발을 위한 연구를 수행해야 하며, 국민 모두가 일상 속에 살아있는 보훈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2024.05.20 김택동 국가인재경영연구원 사무총장/보훈미래특별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