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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 [광복50주년 OSS요원 특별기고]「불발(不發)독수리 작전 1945년 여름」 뉴욕 「카네기 윤리 국제문제 협의회」명예회장 로버트 마이어즈 Robert J. Myers박사는1945년 여름 미(美) 육군(陸軍) 정보전략처 OSS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한반도 침투 첩보 작전 「독수리 계획」 The Korean Eagle Project에 참여했던 귀중한 증언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본으로 부터 독립을 위해 긴 세월 투쟁에 몸바친 한국의 독립투사들의 명예를 위해 특별히 정부가 발행하는 『국정신문』에 보내왔다. 이 특별기고는 50년전 자신의 생생한 기억과 자신이 보관해온 백여 장 되는 당시의 사진 그리고 미국 정보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OSS 비밀기록문서를 자료로 하여 쓸 것이다. 당시에 전우(戰友)로 만난 김능엽(金陵燁) 전 고대총장과 막역한 친구 사이인 마이어즈 박사는 그후 이 「독수리 계획」 인연으로 미국 CIA극동담당부책임자로를 지낸바있다. 작년에 「카네기윤리국제문제협의회」를 은퇴하고 지금은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한국의 현대사(現代史)를 집필중이다. 마이어즈 박사는 한국 정부와의 우정을 생각하여 이 기고문에 대한 사례를 극구 사양했다. 『국정신문』은 꼭 50년전 중국에서 한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장(章)을 이번호와 다음호에 각각 나누어서 싣는다. 1995.06.05
- [신(新)교육 체제 위한 개혁방안]국민의 고통과 부담 줄인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교육대통령이 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한 이후 3년. 오랜 산고(産苦) 끝에 교육개혁안이 지난달 31일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번 개혁안은 현실과 유리된 암기위주의 입시교육이 가져온 교육의 비정상화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사교육비의 부담을 줄이지 않고서는 21세기 세계화·정보화시대에 신한국창조가 불가능하다는 金대통령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가히 혁명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金대통령은 서민의 가계를 압박하는 과열과외를 추방하기 위한 실효성있는 대책을 조속히 시행할 것을 내각에지시했다. 이와 함께 이번 교육개혁안이 성공적으로 정착되면 과외의 필요성도 크게 줄 것임을 믿는다고 덧붙여 교육개혁에 대한 기대와 성공에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한편 교육재정문제와 관련해 김대통령은 교육개혁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GNP5% 수준의 교육재정 확보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며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획기적 재정확보방안을 마련해 9월까지 보고하라고 당부함으로써 교육재정확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번 개혁안은 과열과외가 입시제도의 경직화에 있다고 보고, 국·영·수중심의 대학별고사를 폐지하고 총점 중심의 현행 15등급 내신제 체제를 과목별절대성취 점수와 다양한 활동중심 체제인 종합생활기록부제로 변경했다. 이로써 과외수요가 근본적으로 경감돼 과외망국병이 치유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회봉사활동과 야외 공동생활 등을 통한 실천중심의 인성교육을 실시하는 등 종합적인 인성평가제도를 도입, 지·덕·체를 고루 갖춘 세계시민을 길러 낸다는 방침이다. 실질적 복수지원제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으로 능력에 걸맞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교직원들도 능력위주의 승진 보수체제가 이루어지고 전문성이 강조된다. 교육과정의 현장성을 강화하고 산학(産學) 순환교육체제를 도입해 양질의 다양한 전문인력의 안정적 확보가 가능해져 산업체 구인난 완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학점은행제, 시간제 학생제도, 대학편입기회 확대, 첨단매체를 활용한 원격교육정보망을 이용하여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열린 교육사회의 길을 터놓았다. 중등교육 및 대학교육이 다양화되고 국가기술자격시험이 개선됨에 따라 우리나라 사회발전의 고질적 걸림돌로 작용해오던 학벌중심의 폐쇄성이 극복되고 능력중심의 사회로 변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같은 획기적인 개혁에 발맞춰 정부의 교육행정체제도 규제중심에서 지원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1995.06.05
- [이양호(李養鎬) 국방부 장관 기고(寄稿)]호국 보훈의 달 맞아 안보의식 재무장(再武裝) 절실하다 광복50주년, 분단 50주년이 되는 올해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면서 금년은 남달리 전몰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된다. 우리는 6·25에 대한 그릇된 시각인 소위 수정 사관따위에 오염되어 호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뿐만 아니라 심지어 극히 일부이지만 6·25를 겪은 세대에서 조차도 호국정신이 퇴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사고의 확산 및 대북 경계심이 이완되고 있는 데서 우리의 안보의식에 심각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올바른 안보의식의 재무장이 필요한 시점에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최근 북한 핵문제, 군사 정전협정체제 무력화 기도, 그리고 비무장어선 우성호 피격 및 나포사건에서 보듯이 북한의 비이성적인 행태에서 우리의 안보의식 재무장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아직도 북한의 위협의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안보교육의 현주소는 어떤가? 우리의 안보의식이 피상적이고 감상적이며, 그리고 과거 역사에 대하여 쉽게 망각해버리는 면은 없지 않나 생각한다. 전쟁의 승리라는 이면에는 고귀한 피와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이런 희생이 존경받지 못한다면 누가 목숨을 바치기 위해 전장에 나가겠는가? 우리는 전쟁영웅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스산한 풀숲에서, 이름모를 고지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쓸쓸히 스러져간 말없는 용사들이 존경받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현충일이 오면 야외로 향하는 수많은 차량으로 인해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면서 6·25는 우리에게 잊혀진 잔상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우려된다. 그런 측면에서 참전용사와 그 유가족들이 국민과 어울려 그날을 회상하고 안보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현충일 추모행사(Event)가 없다는 사실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동참하여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안보교육장을 마련할 시기가 왔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은 국난을 수없이 겪었으면서도 수난을 당한 지 반세기만 지나면 전쟁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어느 역사학도의 지적을,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 비록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군에 입대하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의 유일한 목적은 평화이다라고 하였다. 즉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목적이 정의 수호와 평화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러시아에서 북한의 남침자료를 공개한 바 있지만, 스탈린에게 애걸하여 동족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수많은 고통과 한을 남겨준 반민족적 잔악한 행위를 자행한 북한 공산 세력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 참회해야만 한다. 그것은 한국전쟁 3년간 남북한 70만여명의 군인과 무고한 민간인 1백만명이상 희생, 그리고 1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낸 한민족 반만년 역사 중 가장 피어린 참혹한 비극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6.25전쟁기간 중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고귀한 피를 흘렀다. 우리는 북한이 적화 통일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긴장의 끈을 풀 수 없다. 만약에 그대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명언이 있듯이 평화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거저 주어지거나 관념의 유희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과 유지, 그리고 유사시에는 피의 대가를 통해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국가 안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 국가안보야말로우리가 피땀흘려 가꾸어온 오늘의 번영과 영광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수단이다. 힘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를 지킬 힘이 있는 자만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엄연한 동서고금의 진리가 역사를 통해 오늘의 교훈으로 다가와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서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과 애국심을 되새겨 보며. 천하가 비록 태평하여도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천하수안(天下雖安) 망전필위(忘戰必危))는 교훈을 거울삼아 우리의 자세를 다시한번 가다듬어야 하겠다. 1995.06.05
- [인터뷰]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 지방도시 급성장 촉발 기대 우리나라 국민들은 월드컵 대회를 단순한 국제축구경기로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월드컵은 올림픽대회에 비해 시청자가 3배를 넘는 등 훨씬 규모가 큰 국제행사이다. 따라서 사회전분야에 미치는 영향 또한 엄청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대회를 국내 유치를 위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는 월드컵축구유치위원회 (회장 구평회(具平會)) 박경진(朴京鎭) 홍보실장을 통해 월드컵대회유치의 의미와 파급효과를 들어본다. 박 경 진(朴 京 鎭) 월드컵축구유치위(委) 홍보실장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월드컵하면 단순히 축구경기로만 알고 있습니다. 월드컵이 올림픽대회와는 어떻게 다르고 우리가 유치할 경우 한국적인 의미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월드컵을 올림픽과 비슷한 대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은 올림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규모가 큰 대회입니다. 시청자만도 올림픽의 3배인 연인원 3백억명을 상회합니다. 유럽 ·남미 등의 경우 월드컵 열기는 가히 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두 국제대회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면 올림픽이 서울올림픽 등과 같이 한 도시에서 치러렸다면 월드컵은 개최국의 약 12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열리는 전국규모 행사라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대회의 국내유치는 단순한 스포츠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토대로 확실하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발판이 되는, 언제 다시올지 모르는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특히 저는 이 대회를 통해 이룩될 수 있는 지방발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각 지방단위로 최소 12개의 국제규모의 경기장시설과 그에 따른 숙소·교통·통신 등 완벽한 부대시설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낙후된 지방도시들이 짧은 시간에 성장할 수 있는 파급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는 곧 지방화와 세계화를 함께 연결하는 행사라고 할 수 있지요. 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한반도 통일분위기 조성의 촉매제가 될 것이란 전망입니다. 이 대회가 북한에서도 개최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우리가 북한을 초청하게 되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 세계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21세기 최초의 월드컵을 중진국의 선두주자인 한국에서 개최한다는 사실은 전세계 개도국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월드컵대회의 한국유치가 갖는 경제적 효과와 기타 경제외적인 이익은 무엇입니까? -월드컵은 기본적으로 흑자 대회입니다. 역대 유치국 중 적자를 낸 나라는 한나라도 없으며 대회가 열릴 때마다 평균60%씩 흑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78년 아르헨티나 대회에서 3천6백여만 달러였던 총수입이 90년 이탈리아 대회땐 1억60만달러로 3회대회 12년사이에 4.3배 정도 불어났습니다. 또 한국관광공사 조사에 따르면 대회유치후의 간접수입인 관광수입은 90년 로마월드컵의 경우 개최연도에 47만명이 증가해 89년의 1백19억달러였던 것이 90년엔 1백97억달러로 무려 64.7%나 폭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에 끝난 미국월드컵은 3백50만명 이상의관광객 동원기록 등으로 역대최고인 수입 40억달러(약 3조 2천억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토대로 2002년대회 수익을 추정해보면 약 5천억원의 흑자가 예상됩니다. 광고비 ·입장료·TV중계료 등 대회운영 순수입 6백72억원, 25만명의 관광객이 올 경우 관광수입 4천억원, 기념품·복권 등 판매수익금 3백억원이 포함된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최후 한국의 대외이미지 제고로 우리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약 5% 정도 높아져2002년의 수출액이 당초 예상보다 75억달러(약 6조원)증대될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밖에도 우리문화를 세계에 전파할 수 있으며, 국제스포츠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외교적입지가 강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국민의식 선진화와 민족적 자긍심 고양 등의 긍적적 효과가 기대됩니다. ▲경쟁국인 일본과 비교해 볼 때 현시점에서 우리가 유리한 점은 어떤 것입니까? -무엇보다 아시아지역 최강의 축구대국이란 사실이지요. 자격기준이 꼭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대 월드컵 개최국 13개국들은 모두 본선에 5번 이상 출전한 경험이 있지요. 이 점에서 본선에 한번도 진출해보지 못한 일본과 비교할 때 우리는 철샌 유리합니다. 66년 영국대회 때 북한이 출전한 것을 합쳐 본선에 5번 나간 경험이 있고. 더군다나 최근 3회연속출전경험이 더욱 자신감을 갖게 하는 대목입니다. 또한 일본과 비교, 저렴한 물가수준과 지진과 같은 큰 자연재해가 거의 없다는 점도 꼽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지역같은 개도국 사이에서의 정서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도 우리에겐 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경제대국인 일본이 최근 JAPAN리그에서 브라질 등 축구강국의 과거 일류스타들을 경제력으로 다수확보해 해외매스컴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실을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는 입장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일본인에 의한 토착적 축구 발전이 아닌 엔화의 위력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역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공산입니다. 기타 경기에 필요한 경기장시설등은 신축 또는 증·개축해야 하는 우리의 실정과 비슷합니다. ▲월드컵 유치에 필요한 국내여건이 갖춰질 수 있는지요? 구체적으로 소요비용과 시설계책을 개략적이나마 말씀해 주십시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월드컵도 우리가 유치한다면 큰 성공을 거두리라 확신합니다. 먼저 소요비용에는 직접비용으로 대회운영경비, 간접비용으로 경기장건설비·사회간접자본 투자 등이 있습니다. 경기장 건설경비는 FIFA(국제축구연맹)가 최종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기장이 12개라고 볼 때, 신축 7개에 3핀1백50억원, 중측 및 보수 5개 7백50억원, 기타 숙소 등 부대시설에 1천억원 등 모두 5친억원 정도가 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도로·교통 등 사회 간접투자비용은 월드컵 개최를 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익히 추진하는 신경제 5개년계획(93~97)이나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92~2001)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관련, 경기장시설은 이미16개 후보도시를 선정해서 일부는 공사에 들어간 상태이며. 한편으로는 FIFA요구조건에 맞도록 경기장건설 기본설계에 들어가 6월말께 완료됩니다. 교통·수송분야는 기존시설 외에 2001년 완공예정인 경부고속전철과1999년 완공예정인 영종도 신국제공항이 차질없이 진행돼 전국의 주요 도시가2시간이내 교통권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통신·미디어 분야에서도 금년 7월 발사될 무궁화호 위성, 2002년 2단계 초고속정보통신망사업이 완료되는 등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월드컵유치 위원회 의주요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96년 6월 개최지 결정까지 확실한 득표기반을 닦는 것이 우선이지요. 본 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줄곧 각종국제축구관련 행사와 국제축구대회에 월드컵 유치교섭단을 파견, 적극적인 한국유치 교섭 및 해외홍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구평회(具平會) 위원장과 정몽준(鄭夢準)(FIFA부회장 겸 대한축구협회장) 부위원장은 그동안 50여 개국 이상을 방문하여 우리의 유치 당위성과 개최능력을 설명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회개최지 선정까지의 향후 주요일정, FIFA 집행위 구성 등은 어떻게 됩니까.-9월30일 FIFA에 유치신청서를 공식제출하고 10월부터 96년 5월까지 FIFA조사단이 방한, 현지조사를 실시하며 96년 6월에는 개최지가 FIFA집행위원 21명의 투표에 의해 최종 결정됩니다. 현재 FIFA 집행위는 회장 1명, 부회장 7명, 위원 13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 지역별로 배분되어 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중, 남미에서 각각 3명씩 모두 12명이고 유럽이 8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아벨랑제 회장(브라질)은 가부동수인 경우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의 투표에 의해 2002년 월드컵 개최지가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까지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한·일이 백중세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향배가 최후의 승패를 가름할 것입니다. 1995.06.05
- [일본(日本) 고베 지진 연구]책임추궁보다 다음 예방 우선-언론 한국언론연구원은 지관 24일 고베지진-일본사회 및 언론의 대응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엔 ▲역사·정치·행정 ▲공학·방재대책 ▲사회·교육·기업·안전 ▲언론 등 4개 분야별 주제발표에 이어 토의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재해연구로 평가되는 이번 세미나의 언론 및 사회교육분야 주요발표 내용과 토론요지를 소개한다. 언론연구원 세미나 언론분야 ◇발표요지 ▶김정탁(성균관대·신방과) 재해에 대한 한·일 언론보도 비교결과 일본 언론은 천재이다. 따라서 체념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Press as Socialization(언론의 국민사회화 계몽기능)인 반면 한국언론은 인재이다. 따라서 방지할 수 있었다. 정부는 책임을 져야하고 재난방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야 한다는 Press Watch Dog(언론이 제4부로 기능)로 기능함. 일본언론은 고베의 소홀한 방재대책 비판보다는 다음의 재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보도하고 있었음. 그러나 한국언론은 우선 희생양을 선정하여 발견되면 사건을 흐지부지 종료시킴. ▶정연구(언론연구원 연구위원) 일본은 재해 때 언론사가 방재기관이라는 의식을 소유 (NHK는 재해대책 기본법에 의하여 재해관련 공공기관으로 지방). 인쇄시설이 파괴된 고베신문은교토신문과 고베신문간 94년 1월 체결된 재해시 신문발행 상호원조협정에 의해 신문을 발행함. NHK뿐 아니라 민간 신문방송에서도 향후 1~2년에 걸쳐 진재에 대해 계속 연구,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보도의지 피력. 누구나 재해가 발생하면 NHK를 본다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위기시 NHK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NHK가 재해보도에 대량의 인원과 장비투입을 하는데 기인.(예:고베지진에 NHK는 1천명 투입, KBS 보도국 전체인원은 4백59명) 따라서 일본의 재해보도의 성숙한 측면을 교훈삼아 ①총체적 방재기구 설립 ②KBS의 방재관련 공공기관지 정을 제안함. ◇논평 ▶한중광(KBS해설위원) 최근 정보의 양과 흐름이 매우 복잡하다. 한·일간 문화차이도 생각해야 한다. 한국언론이 희생양을 찾는다는 결론부문에도 동감. KBS를 방재기관으로 지정하는 문제는 잘 생각해야 함. 재해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보도메뉴얼은 현재 작업중임. ▶길승흠(서울대 정치학과) 서해훼리호 침몰 때 10일이상 보도해 국민 불안을 조성했으나 홋카이도 지진 땐 일본언론은 필요한 사항만 보도. 지금 10~20대도 달라지고 있으나 언론은 아직 안 바뀌고 있음. 일본 사람들도 한때 사재기를 했음. 일본의 질서의식도 요즈음의 일임. 한국사회도 변하고 있음으로 언론도 바뀌어야 할 것임. ▶김경동(서울대 사회학과) 일본 NIRA 5월호 뉴스레터에 대진재에서 많은 자원봉사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세제혜택 등 이들의 지원방안이 필요 한 것으로 지적. 새로이 형성되는 시민사회개방의 관점에서도 자원봉사활동이 좋은 계기가 됨. 대구가스폭발사건도 자원봉사 문제가 보도되었음. 재해사회학은 미국에서 20년전에 이미 활발했음. 이번 이재민 Survey는 현실적으로 불가. 일본 고베대학은 고베지진에 관해 2~3년 계획으로 연구중임. ▶김광억(서울대 인류학과)일본의 질서의식·책임감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음. 군국주의의 수직적인 국가주도를 거쳐 많은 변화가 있은 후에 시민운동 등 자발적인 결사체가 많이 생겨남. 지방자치가 실시될 경우 재난 대응방법에 대한내무부의 연구가 필요함. 재해대비한 재정문제는 아무도 거론을 하지않고 있음. 중국 당산지진, 미국 지진 등 각국의 대응방안에 관한 비교 연구도 중요한 과제임. 사회·교육·기업·안전분야 ◇발표요지 ▶문옥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베지진 때 피해확산은 인재적 요소가 많으나, 고베시민들은 사태수습 후 천재로 돌려 체념할 가능성이 높음. 고베지진의 특성 중 하나는 피해가 저소득층·소수민족·노인·여성·외국인 등사회적 약자에 집중되어 앞으로 사회격차와 갈등을 심화시킬 것임. ▶곽영우(전북대 교육학과) 고베대진재에서 교육이 입은 피해는 컸으나 전·입학 배려, 학비감면, 정신건강상담, 학교 및 교육문화시설의 복구 등 피해 재학생에 대한 교육부문의 순발력있는 대응과 교육행정을 통한 일련의 행정·법규적 조치는 재해복구와 교육적 손실을 최소화하는데 기여 ▶이종구(성공회대 사회학과) 고베에서 자원봉사자 등의 자발적인 구조활동이 돋보였으나 행정측의 대응자세는 결여되었음. 반면 기업은 신속히 대응, 사원가족을 구출하고 시민에 게 상품을 공급함. 피난소에서의 자발적 리더 중에는 중년의 기업체 관리직 사원. 학교교사 등이 활약했음. 또한 재해 땐 정신적 후유증을 방지하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함. ◇논평 ▶한영혜(한신대 사회학과) 자치회 활동지역이 피해가 적었는데 고베진재에 제일 먼저 대응했던 자원봉사자에 대해 구체적 언급이 없는 바, 어떤 조직,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고, 자발적 리더는 나왔는지 그리고 조직간 갈등은 없었는지 등의 내용이 보완되어야 하겠음. ▶성준용(호남정유 상무) 한국의 화학공업은 세계 5위이며, 화학공장 사고시 환경오염 제거에 수십년 소요. 인도 보팔사고 땐 3천명이 사망하고 10만명의 사상자가 났음. 우리나라공단의 경우 재해에 취약함. 여천공단은 세계적 규모로 매년 11~12조원 매출을 올리고 있으나 시설이 노후화돼 안전상문제가 있음. 특히 공단지역 l0km이내에 1만명. 30km이내에 30만명이 살고 있어 대폭발땐 엄청난 재난이 우려됨. 행정규제뿐만 아니라 기업·주민 등의 자발적인 안전대책도 중요함. 구체적으로 ①국민들이 안전의식고취 홍보 ②기업의 자발적인 안전투자 ③종합적 재난 지휘 기능 확립 ④환경분야와 같이 기업에 안전등급 평가제도 도입(녹색·청색 등) ⑤경인·여천지역 재난 대비훈련 정례화를 제안함. 1995.06.05
- [직제개정 협의 간소화]재경원·총무처 합동심사 총리실 각 중앙행정기관의 직제개정 협의절차가 대폭 간소화된다. 긴급한 행정수요 발생으로 불가피하게 직제개정이 요구되는 경우 각 중앙부처가 직접 총무처와 재정경제원에 이중으로 협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현재의 관행을 앞으로는 두 부처가 합동으로 심사하도록 일원화한 것이다. 국무총리실은 지난달 19일 각 부처간 업무효율의 증진을 위해 이같은 내용을골자로 한 직제개정관련 간소화 절차를 해당부처에 지시했다. 이 내용에는 또 두 부처가 이미 협의를 마친 연도중 공무원 정원운용계획 범위 내에서는 각 중앙행정기관이 별도의 예산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직제개정안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재경원과 총무처는 매년 1월중에 전년도의 공무원 증가추세 및 당해 연도의 행정수요 변동 등을 감안, 연도중에 공무원 정원운영계획을 협의하고 있다. 따라서 총무처는 연도중에 이런 정원운용계획을 초과하는 직제개정안은 되도록 처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지난해 단행된 정부조직개편의 기조에 따른 것으로 전체적인 기구와 정원의 동결을 계속 유지하도록 한 것. 단 새로운 행정수요가 생기는 경우 기구신설이나 정원증원을 최대한 억제하는 한편 기관간의 정원 이체(移替). 한시조직 및 부처별 자율적인 과단위 기구개편제도 등을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했다. 한편 올 하반기 공무원 정원운용계획은 6월말까지 재정경제원과 총무처가 협의해 결정하게 된다. 1995.06.05
- [광복50주년 OSS회고 1부]불발(不發) 독수리작전 1945년 여름 [제1부] 여러가지 전쟁이 여러 수준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나의 개인적 회고 내용은 한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그야말로 인간적인 차원의 한 전쟁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쓴 것이다. 전혀 순진한 한 구경꾼이었던 나는 한국인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이 무엇인지점차 알게 되었다. 펄벅의 시각(視角) 독립과 국제사회에서의 입지 확보를 위한 한국인들의 투쟁은 1910년 한일합방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1896년 청일전쟁과 1904년 노일전쟁 이후 재앙의 조짐이 임박하고 있었다. 두 전쟁으로 인접 강대국들의 균형이 깨지고 결국 한국은 일본의 강점(强占)하에 들어갔다. 이를테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도록 한 미국과의 조약에도 불구하고 디오도어 루즈벨트 당시 미국대통령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그는 노일전쟁을 중재했다는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다니 역사의 비극과 아이러니는 놀라울 뿐이다. 제1차대전이 끝나자 한국에는 민족 자결이라는 또 다른 기회가 왔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 외교의 영향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제2차대전은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기회였다. 중국 얘기로 유명한 미국 여류 소설가 필백은 2차대전 중 일찍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남다른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을 두번 배반했다. 물론 어떤 미국인들은 실제로 한국을 배반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 안다. 미국과의 조약이만일 한국이 누구든지 예상할 수 있었던 일본과 같은 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꼭 도와야된다는 내용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그 조약의 법적 측면이 어떻든간에 문제는 한국인들은 그 조약을 미국이 한국을 꼭 돕겠다는 약속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美國)의 배반 우리는 한국을 다시 배반했다. 본의는 아니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분명히 우리가 배반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민은 1차대전후 약소국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우드로 월슨 대통령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 그들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일본에 항거하여 궐기했다. 그러나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그런 시위 사태가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진압군에게 살해되었고 가슴터지는 실망과 함께 우울한 암흑의 시대가 한반도를 덮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민족성에 내재한 끈기를 가지고 자유를 얻기 위한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그들의 결의는 오늘날 매우 분명하고 희망차게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한국내 어디서나 은밀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 불길은 바로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해외로 망명한 많은 한국인들 가슴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들의 독립정신을 인정하고 중경에 있는 한국인들의 임시망명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3월18일자 『The new Leader』지 We Who Fight The Common Enemy에서 부분 전재(轉載), 미국 호놀룰루 Legislative Committee of the Korean Civic Association 에서 1944년 3월18일 발간(發刊).) 20살의 젊은이였던 나는 OSS의 한국관련 작전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당시 이러한 대국적인 전략과 분노어린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신문에는 한국에 관한 기사도, 한국인들이 주장하는 정의에 대한 얘기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영, 불, 중, 소, 미국 등 연합국들은 정상회담을 수차례 가지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카이로 회담 때 한국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urse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애매한 표현만 남겼을 뿐이다. 그렇게 된 것은 미 국무부 실무급 관리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만일 한국 문제가 제기되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후 세계를 전적으로 젊어질 미국의 중요한 동반자로 어떻든 소련을 끌어들일 생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의지가 확고한 스탈린에 맞서 한국의 권익을 충분히 보호할 수 없으리라는 우려였다. 이범석(李範錫) 장군과 만남 한국의 독립이라는 최종 목표를 앞당기기 위하여 대체로 정치적인 방법으로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수준에서 쉬지 않고 한단계 한단계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중경(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서성(陜西省) 서안(西安)의 광복군 제(第)2 지대(支隊) 및 안휘성(安徵省)의 광복군 제(第)3 지대(支隊)였다. 곤명(昆明)에 본부가 있는 OSS는 광복군의 위 두 지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범석(李範錫) 장군이 지휘하는 제2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뒤에 나는 안휘성(安徵省)에 고립된 제3지대로 전속되었다. 나는 시카고대학에서 일본학을 1년간 공부하다가 OSS에 징집됐다. 그 당시 우리 동창 중 5명 만이 OSS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계속 학교를 다였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OSS 본부로 가서 훈련을 받았다. 나는 중국으로 가서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군의 전투 서열 Order of Battle 과 그 전투력과 배치 등을 배웠다. 어했든 우리는 교육의 의도를 잘 몰랐다. 일본군의 전투 서열은 매우 배우기 어려웠다. 일본말 자체가 수수께끼 암호 같았다. 중국에 있는 군단, 사단, 연대의 이름에 붙힌 간단한 암호 말조차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한 사단은 일본어로 눈이란 뜻의 유끼라고 불렀는데 그 사단의 위치와 전투장비는 OSS의 우선순위에서 매우 높았다. 나는 1945년 3월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에 파견되어 비밀정보부대장 헬리웰 Paul Helliwell중령에게 신고를 했다. (헬리웰 중령이 워싱턴에 보낸 월례보고서는 OSS 문서 여기저기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 다음 나는 서안(西安)에 가서 그곳 OSS 팀의 미군 지휘관 싸전트 Clyde Sargent 대위와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을 만났다. 싸전트 대위는 매우 학구적 이었고 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35세로 약간 붉은 가는 머리칼과 뻐덩니를 가지고 있었다. 유창한 중국어가 그의 큰 장점이었다. 대학을 갓나온 나는 일등병이었다. 우리는 교육을 마친 후 모두 장교로 임명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되질 못했다. 나의 낮은 계급과 한국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싸전트 대위는 나를 민간 신분의 기술요원 기장(記章)을 달아 주었다. 그래서 장교 클럽에도 출입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훈련시키게 될 피교육자들에게 권위가 서게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임무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했다. 독수리와 불사조 나의 임무는 대부분 일본 군대에서 탈출해온 한국인들에게 미국식 첩보수집 기술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선교신방법도 교육 받았다. 교육이 끝나면 둘 또는 셋을 한 조(組)로 짜서 한국에 침투시켜 일본군에 대한 첩보를 수집 보고하게 하고, 여건이 성숙하면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시킬 생각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은 몇년간 더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에 이 계획은 자연히 장기(長期) 작전으로 짜여졌다. 이러한 계산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OSS 기록철에서 한국관련 작전계획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1945년 4월 9일 워싱턴에서 가졌던 한 참모회의 비망록에 나타나 있다. 붉은수염 REDBEARD은 분리된 작전으로 수행할 수 없다. 아마도 산동(山東)반도는 독수리 EAGLE와 불사조PHOENIX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암호로 오고간 대화 속에 한국관련 작전의 암호명 독수리에 관한 이런 기록이 나온다. 헬리웰 Helliwell 대령은 한국인들의 도착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독수리 작전에는 한국인들이 잘 맞으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인들은 미 전역에서 징집되어 온 재미교포 그룹을 가리킨다. 그들이 결국 9월1일 서안(西安)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바로 하룬가 이틀전에 곤명(昆明)을 거쳐 안휘성(安徵省)으로 떠난 뒤였다. 이 기록은 OSS가 얼마나 장기적인 계획 속에서 독수리 작전을 지원하고 또 워싱턴 회의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는가 잘 말해준다. 싸전트의 생각은 서안(西安) 남쪽 두곡(杜曲)이라는 마을에다 훈련요원, 보고서 작성, 보안 및 방첩 요원을 다 갖춰서 워싱턴 OSS본부의 전반적인 작전을 그대로 복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싸전트 대위의 희망과 열망은 인도로부터 군수공급이 원활해짐에 따라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전까지 군수물자 수송은 주로 의약품과 소형 무기들이었는데 내가 6x6 트럭에 싣고 신명(晨明)에서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를 거쳐 서안(西安)까지 1천5백마일의 울퉁불퉁한 도로와 철주 부교 등을 건너 수송했다. 2주 걸리는 보급로에는 우리 물품을 훔치려는 중국 비적(匪賊)들도 있었다. 형편없이 파손된 이 트럭 한 대와 다른 한 대의 짚차가 독수리 작전의 기동력의 전부였다. 이 짚차는 뒤에 좀 불명예스러운 운명을 만나게 된다. 한국탈출 첩자들 독수리라는 암호명. 비밀 첩보 작전의대부분은 새들의 이름을 따랐다. 암호명은 작전의 진짜 이름과 위치를 숨겨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 다른 암호 새 이름들 중에서 독수리는 가장 매력적인 이름이었다. 한국의 미래를 위한 이 작전이 잘되기를 바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었다. 또 한·미두 나라의 신화로 남기를 바라는 측면도 있었다. 독수리 작전은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OSS문서 중 1945년 4월 20일부터 5월20일까지를 커버한 한 보고서가 그렇게 평가했다. 중국 전선 첩보 장교 월간 보고서인데 중국 전선에 파견된 OSS 정보장교 위타커 John T. Whitaker 보병 대령이 작성한 것이다. 독수리 작전에는 이범석 장군과 싸전트 대위 그리고 한 통신장교 (사실은 미국인이 나를 포함하여 4명 더 있었는데 위타커 대령의 주요 보고사항이 인원이 아니어서 인원수는 소홀했음)의 지도아래 마추리 훈련을 받고있는 40명 남짓되는 대원이 있다. 최근 한국을 탈출한 이 첩자들은 강인한 인상을 주며 일어에 능통하고 지하운동에서도 그들의 충성심이 검증된바 있다. 교육수준도 높았고 몇몇은 법률가이거나 그와 유사한 직업이었다. 그들의 캠프를 방문했을 때 그 군(軍) 기강(紀綱), 군대예절, 단정함, 그리고 훈련에 열중하는 모습에 더욱 감명받았다. 이범석 장군은 독수리작전이 이렇게 훌륭한 방법으로 추진될 수 있었던 데 대하여 일찍이 두곡(杜曲)을 방문했던 OSS 장교 헤프너 Heffner 대령과 OSS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물었다. 이들 유망한 한국 대원들 훈련은 OSS소속 6명의 미국인과 한국측 교관 지위하에 5월과 6월 두달 동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범석 장군은 매일 이른 아침 강의를 통하여 그의 부하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고취하는 말로 활기와 영감을 불어넣었다. 우리들의 본부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도교(道敎)사원이었다. 이 사원에 교육을 위한 강의실과 李장군과 예하 참모 그리고 싸전트대위와 미국인 5명의 집무실도 있었다. 나는 대개 일주일에 한번 정도 李장군을 지프에 모시고 20마일쯤 떨어진 서안(西安) 시내로 나가곤 했다. 중국 옥(玉)과 도자기도 구경하고 李장군이 만주시절 함께했던 동료들도 만나곤 했다. 짚차를 타고 가면서 그는 가끔 38 구경 리벌버 권총으로 논에서 벼를 쪼아먹는 까마귀 떼를 기(基)아었다. 자기는 항상 목표물의 1인치 이내를 맞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자동차 운전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페달과 핸들 조작에 열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싸전트 대위의 보고서 OSS의 독수리 야전 지휘관 싸전트 대위가 1945년 6월 헬리웰 대령에게 보고한 월례 보고서는 단일 보고서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보고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작전계획에 대한 개관(槪觀)과 세부설명은 어떤 때 너무 튀는 느낌을 주지만 원대한 싸전트의 작전구상을 담은 것이다. 그는 서안(西安) 지휘관 크라우스 Gus Krause 소령과 다툼이 있었다. 서안(西安) 본부의 일본인 2세 치쿠오 이케다 지전(池田) 대위는 6윌에 독수리 작전도 이제는 서안(西安) 본부의 다른 작전들처럼 독립적으로 지휘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비록 크라우스 소령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은 남아 있었지만 싸전트 대위는 매우 만족했다. 싸전트 대위로서는 이 달의 활동과 그 호과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진전도가 우리가 바라는 속도보다는 늦고 있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아 만족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독수리 작전이 만족을 줄 만큼 기능할 것인가는 7월말에 가야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이라고 신중을 기했다. 싸전트는 7월말쯤 되면 새로 훈련된 한국인 무선요원 몇 개의 조(組)를 중국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침투시킬 준비가 완료되고, 재미 한국교포 대원들이 그가 구상하는 지휘본부를 세워 침투 무선 요원들로부터 받는 첩보 내용을 자체 분석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6월내내 싸전트의 주요관심은 진짜 훈련 기지를 만들기 위한 조직 내부의 문제와 행정적인 일 그리고 건축 업무 둥 따분한 세부계획에 매달렸다. 이 꿈의 훈련기지 본부건물은 쥐가 들끓고 무너져가는 도교(道敎) 사원이었다. 터무니없는 환상 싸전트 대위는 이 훈련기지의 보안 문제, 특히 물리적 안전 문제에 신경을 썼다. 그는 서안(西安) 본부요원들의 두곡(杜曲) 방문을 이합법적인 보안 이유를 들어 막고 또 자신의 투철한 보안의식을 상관들에게 과시했다. 여기서 짚어줄만한 아이러니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李 장군을 지프로 모시고정기적으로 서안(西安)에 나갔던 일을 감시요원이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논과 참외 밭으로 둘러싸인 두곡(杜曲)이라는 농촌마을 한 끝에는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훈련 기지에서는 전적으로 중국산 음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아둔한 중국인이라 해도 우리들의 국적을 몰랐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환상이다. 그러나 경호원을 중시했던 닉슨식 생각에서 싸전트는 보안 문제를 밀고 나갔다. 정규 교육과정 이외에 보안장교를 교관으로 하고 12명의 학생이 참가하는 특수무기반(特殊武器班)을 열어 훈련기지에 대한 지역방어를 대비했다. 특수무기반 1기생은 6월30일경 기본 훈련을 끝냈다. 2기생은 현재 교육중이다. 이들 2개반 24명중 18명이 선발되어 교육이 끝나면 곧 기지 방어의 주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군복도 도착했다. 이 군복은 중국군 군복과는 아주 다르게 구별된 것으로 싸전트의 보안 관념을 망쳐 놓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파티를 열었다. 파티 끝장에 흥이 오른 미국인들은 모두 아라파트식으로 총을 공중에 대고 발사했다. 몇 차례 일제사격 소리는 결국 인근 중국 농부들의 고함과 불평 소리와 함께 끝났다. 게다가 일본군은 이곳에서 30마일밖에 안 떨어진 황하북안(黃河北岸)에 주둔하고 있었다. 침투방법이 문제 워싱턴 OSS 본부에 제출한 위타커 대령의 6월 보고서는 매우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독수리 작전은 최종 훈련을 거의 다 마쳤고 선발대는 곧 목적지로 출발할 준비가 되어있다. 첩보 장비나 훈련상태는 최상이다. 하지만 수년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이 작전에 기대를 많이 걸고있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이 지역에 침투하기가 펼씬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은 일리있다. 여기서 위타커는 싸전트와 그의 참모들이 해결하지 못한 한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대원들이 북부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침투시킬 수 있는 정확한 방법론이 문제인 것이다. 교육 계획이 끝나가는 7월말이 다가옴에 따라 이것은 점점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두곡(杜曲) 훈련기지의 물리적 안전 문제에 대한 싸전트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가끔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그중 한가지는 이 작은 마을에 심리전 부대 Morale Operations가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OSS기록에도 역시 심리전과(課)가 제출한 6월 보고서가 있다. 중국에서 그 숫자는 작았지만 거의 모든 작전에 심리전 장교가 파견되어 있어서 그 영향력은 모든 계획에 미쳤다. 독수리 작전에는 에반스 Albert Evans 대위가 파견되었다. 에반스는 독수리 작전을 위한 심리전 지침을 제공해야한다. 도대체 심리전 지침이란 어떤 것인가? 심리전은 선전 전쟁이다. 이를테면 공개적인 백색 선전은 BBC가 한다. 그러나 거짓 흑색 선전은 심리전 부대가 한다. 그들의 선전물은 적군 즉 일본군을 오도하여 사기를 저하시킴으로써 아측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을 주도록 짜여진 거짓 내용으로 만들어진다. 중국 전선에서 심리전 요원의 정원은 82명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심리전 지부는 지금까지 수행했던 작전보다 더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특수 작전 야전팀과 특수 첩보대와 연계하여 심리전 임무를 수행하는 방침을 택했다. 이 방침으로 장비와 통신시설을 절약하고 결국 예산과 군수물자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심리전(心理戰) 부대 에반스 대위는 6월27일 도착하여 손쉽게 정착했다. 늘 텐트로 만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전쟁을 꽤 잘 분석했다. 신도(神道), 당시 일본 국교(國敎)는 그 자신의 무게에 못이겨 곧 붕괴할 것이다. 그는 거짓흑색 전단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만들지 않았다. 일본의 전쟁 명분이 무가치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심리전 부대가 그런 미덕(美德)을 발휘한 것은 아미도 에반스가 가졌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효자(老子)사상이 가세(加勢)했던 것으로 보인다. 싸전트 대위는 자신의 장기적인 독수리작전 구상에서 심리전 부대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사실을 알았다. 심리전 부대는 이곳에 한 요원을 파견하여 독수리 작전의 일부로서 심리전 프로그램의 활용 가능성과 잠재력을 검토하고 있다. 독수리 작전의 심리전 프로그램은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에서 명백히 유용할 뿐만 아니라 독수리 작전의 다른 국면에도 분명히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연구 분석을 담당하는 요원 한 사람이 곧 독수리 작전에 합류하게 되면, 독수리 작전의 주목표지역 즉 한국에 대한 연구 분석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방첩과 X-2 가 첩보 연구 요원 한 사람을 독수리 작전에 파견하여 필요한 방첩 관련 첩보 수집토록 하는게 바람직하다. 독수리 작전은 또한 특수작전 SO 즉 준군사적 형태의 기습작전 잠재력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작전의 훈련 추진은 첩보 작전이 자신있다고 판명될 때까지 유보하되, 독수리 작전의 범주 내에서 요청이 있을 경우 어떠한 특수작전도 전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는다. 현재 확정된 계획은 첩보 작전뿐이다. 요리사 확전 요청 싸전트에게 허락된 현실 세계는 원대한 심리전 구상들로부터 한발 떨어진 작은 막사로 돌아와야 했다. 자신을 포함한 여섯명 중의 한 명은 심리전 장교였고 또 다른 한명은 해군에서 차출된 전투 사진 촬영요원이었다. 싸전트가 하고 싶었던 실제업무는 통신교육 장교, 일반교육 장교 그리고 나를 지휘하여 학생들이 일본 군대에서 경험한 내용을 정리하고 훈련 대원들에게 연합군의 전투 서열을 교육시키는 일 전부였다. 싸전트의 개인적인 약점은 보안의식이었다. 그는 의사만 제외하고는 중국인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요리의 천국에서 우리는 어떠한 요리맛도 즐길 수가 없었다. 싸전트에게는 미 육군 요리사파견 요청이 당면한 최대의 우선 순위였다.(사실 싸전트 자신이 식사는 물론 일품요리까지 만들 줄 아는 훌륭한 중국 요리사였다.) 우리 미국민들은 새 요리사가 올 때까지 매일 순번제로 식사를 담당했다. 심지어 이범석 장군도 요리하는 날을 하루맡았다. 연락망 구축 1945년 6월의 헬리웰 보고서는 당연히 싸전트 보고서와 유사했다. 독수리 계획은 첩보 및 통신교육의 최종 과정에 접어든 약 60명의 대원이 아직 훈련중이라는 똑같은 귀절이 두 보고서에 나온다. 당면 목표는 우선 만주를 경유 한반도까지 믿을만한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대부분 일본 군대에 소속되었던 혼련 대원들의 이 지역에 대한 최근 경험은 이 계획수립에 유용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검토하면 그 경험만으로 서안(西安)을 출발하여 일본군 전선을 뚫고 일본 점령하의중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문서분류는 어떻게 할지, 문서 표지내용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무선장치들은 어떻게 감출지, 그리고 첩보 소설에 나오는 잡다한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나는 싸전트가 대원들을 성공적으로 침투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 대원들은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분명히 만주까지 그냥 걸어가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7월4일 독립기념일 직후 나는 진흙벽 집무실에서 타자기 앞에 앉아 대원 침투파견에 대한 및 가지 대안을 궁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李 장군이 방에 들어와서 나무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는 그날따라 농담을 걸면서 내 건강 등을 물었다. 보통 때와 달리 명랑한 기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기다렀다. 한참 궁금했던 말이 나왔다. 이범석(李範錫)과 지프 내가 지프 운전을 배울 때가 된 것 같네. 자네가 운전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니까, 조금만 교습을 받으면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린 아이 장난 같은 거지 뭐. 그의 말은 분명히 요청은 아니었다. 그는 지프 운전수가 되는데 대한 내 찬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바로 명령이었다. 지프는 집무실 밖에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책상서랍에서 열쇠를 꺼냈고 우리는 운전교습을 떠났다. 나는 곧게 별은 20피트 폭의 공로(公路)를 반 마일 정도 운전해 나갔다. 이 길보다 8피트 낮게 수마일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길에는 건설 공사용 큰 돌덩어리를 나르는 소달구지가 가끔 느릿느릿 지나갈 뿐 조용했다. 하늘에 구름 한점 없이 밝은 오후였다. 李장군은 가볍게 운전석에 앉았다. 내가 그에게 열쇠를 건네주자 그는 시동을 걸었다. 나는 기어와 클러치 그리고 브레이크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는 아이들 장난 같은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급출발을 했고 아무 문제없이 소달구지들을 지나치면서 서안(西安)을 향하여 북쪽으로 달렸다. 약 5마일 정도 가서 그는 제동을 걸어 차를 멈추었다. 출발과 제동. 그리고 후진을 반복하면서 지프 운전을 익히는 것이다. 한 30분 이 연습을 한 후 그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기지로 향했다. 모든일은 순조롭게 굴러갔다. 몸에 밴 인분냄새 그러다가 갑자기 낭패를 만났다. 도로 오른쪽에 소달구지가 싣고가다 흘린 큰 돌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돌 왼쪽으로 피해 가라고 일러주었고 잘 될 것 같았다. 그는 말한대로 하려다가 브레이크를 떠난 오른발로 그만 액셀을 밟고 말았다. 지프는 그대로 돌진해 버렸다. 지프의 오른쪽 앞부분이 나무에 부딪혔고 오른쪽 앞바퀴가 빠져 나갔다. 지프는 격추된 비행기처럼 앞 대가리를 논에 처박았다. 李장군이 핸들을 꽉 움켜쥐고 차에 매달려 있는 동안 나는 오른쪽으로 튀어나갔다.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논에 비료로 준분뇨를 뒤집어했다. 지프가 논에 잠기는 것 같았다. 논바닥에서 겨우 일어난 나는 무릎으로 기어서 지프로 갔다. 李장군은 핸들을 계속 움켜잡고 있었다. 나는 핸들이 그의 위장과 갈비뼈 사이를 압박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군을 조심스럽게 지프에서 꺼내 모셨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부서진 지프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바퀴는 충돌을 피한 듯 조금 떨어져 놓였다. 논에 빠지면서 지프는 보대가 꺾이지는 않았다. 기어박스만 부서졌고 여기저기 기어 조각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장군과 나는 이 기계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이곳 서안(西安)까지 온 것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다지 심하게 손상되진 않았어 장군이 말했다. 예. 쉽게 고칠 수 있어요 나는 외교적인 대답으로 끄덕였다. 트럭소리가 들렀다. 트럭에는 열성적인 한국인 훈련대원들이 가득 탔다가 지체없이 뛰어내렸다. 논두렁으로 몰려가 힘을 합쳐 지프를 끌어내고 장군과 나를 트럭 운전석으로 모셨다. 우리는 서둘러 막사로 돌아왔다. 李장군은 깊은 타박상을 입고 며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나는 몸을 씻고 나니 심한 부상은 없었다. 다만 며칠동안 심한 인분 냄새가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지프는 못 쓰게 되었고 가까운 시일에 새 지프 보충은 가망이 없었다. 우울한 순간이었다. 두주일이 지나서야 李장군은 그 사고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이 사고는 물론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웃기 시작했고 배갈을 함께 마셨다. 삶은 다시 평상처럼 계속되었다. 한국인 첩보팀을 실전에 투입하기 위한 어떤 조처를 강구하는 문제만 남았다. 1995.06.05